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71-1
[이인성 나무와 좌측 계산 문화관 전경]
李仁星(이인성, 1912~950)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며,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이다.
수채화와 유화 등을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기법으로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렸다.
잘 짜인 구도감과 담백한 유화를 보는 듯한 터치와
물감으로 그리는 수채화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만 38세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인성 나무 전경]
이인성은 대표적인 근대 서양화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하여 일제 강점기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는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소재와 색채 표현에 있어 조선의 미를 구현했다.
[이인성 나무]
이인성은 1912년 8월 29일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양친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보통학교 역시 11세가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인성 나무 안내판 전경]
[안내판 이인성 화백의 감나무 그림]
[이인성 나무 안내판 글 내용]
[이인성 나무(감나무)]
1929년, 18세 때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그늘’로 입선.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는 수채화 ‘세모가경’으로 특선을 받았다.
이인성의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지역 유지들이 그의 도쿄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1935년, 이인성은 대구로 돌아왔고, 그해 대구 남산병원 원장
김재명의 딸인 김옥순과 결혼하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이듬해 ‘이인성의 양화 연구소’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으며,
1937년에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정면에서 담은 이인성 나무 전경]
짧은 그의 인생에서 20대의 젊은 날들이 예술가로서의 전성기였다.
그의 대표작 ‘가을의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한정’
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는 수채화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유화로 매체를 바꾼 지
2∼3년 만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유화로 완성했다.
[정면에서 담은 이인성 나무 전경]
1942년, 이인성은 아내와 사별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런 한편 1940년대 중후반에는 작품 활동보다
후진을 양성하고 화단의 중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50년 11월 4일,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인성 나무와 뒤쪽 계산성당과 매일신문 전경]
당시는 한국 전쟁 중이라 경찰의 검문이 강화되었던 때였는데,
이인성은 검문하던 경찰과 시비가 붙은 와중에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가 일어나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후 이인성은 화단에서 잊힌 화가가 되었다.
또한 일본 관전의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성장한 화풍 때문에 친일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한국 근대 미술 60년展(전)’과 함께
서울 한국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리면서 이인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인성은 조선의 향토성을 가장 잘 구현한 선구적 작가로 인정받았다.
데레사
2018년 5월 2일 at 9:38 오전
계산동 성당의 옛 모습을 보니 반갑네요.
저곳에서 미사를 몇번 참례했어요. 친구가 계산동에 살아서요.
이런분들이 좀더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초아
2018년 5월 2일 at 8:57 오후
미사에 몇번 참례를 하셨다면
추억도 많으시겠어요.
너무 어이없게 돌아가시게되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