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979
대구문화재자료 제13호
[광복소나무와 첨백당 전경]
宣祖(선조, 25) 1592년 임진왜란 때 丹陽人(단양인) 禹翊臣(우익신)
자 有義(유의)가 난을 피해 경기도 驪州(여주)에서 남하하여 八公山(팔공산)
남쪽 龍岩山(용암산) 계곡 내의 작은 평지에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이 坪廣洞(평광동)
丹陽(단양) 禹氏(우씨)의 世居地(세거지)가 되었다.
광복소나무에 대해 알아보시려면 요기 클릭 하셔요.^^
[좌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대구 평광동에 자리한 첨백당은 고종 3년(1896) 丹陽 禹氏(단양 우씨)의
재실로 지어졌는데, 단양 우씨 후손 중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禹孝重(우효중)과,
조선시대 말기 때 節義(절의)를 지켰던 선비 禹命植(우명식)을 기리고 있다.
[안내판과 첨백당 표석비]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瞻栢堂(첨백당) 표석비]
[첨백당 오르는 돌계단]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斷指(단지)하여
그 피로 回生(회생) 하게도 하였으며, 돌아가신 뒤로도 3년 侍墓(시묘)의
孝行(효행)으로 벼슬이 朝奉大夫重蒙敎官 同知中(조봉대부중몽교관 동지중)
樞府事(추부사)에 증직되었던, 禹孝重(우효중)과 한말의 국운의 기움을 슬퍼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산 禹命植(우명식)의 절개를 기리며 아울러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高宗(고종, 33) 1896년에 세운것으로 1924년에 重修(중수) 하였다.
[瞻栢堂(첨백당) 현판]
[瞻栢堂(첨백당) 전경]
堂號(당호)는 禹命植(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잣밭골(栢田谷, 백전곡)들 우러러 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첨백당이라 하였으며 150평의 안마당에 건물은 5樑(량)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박공면에 내림지붕이 붙어 있다.
[좌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대청은 우물井자형이고 양쪽 툇마루는
대청보다 1자가량 높으며 난간이 아담하게 둘러져 있다.
[瞻栢軒(첨백헌) 현판]
[첨백당 좌측 내부 전경]
[첨백당 우측 내부 전경]
[敬止齋(경지재) 현판]
敬止(경지)의 뜻은
윗사람을 공경함.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받들어 모시다
끝없이 노력하면 날마다 달마다 발전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우측에서 담은 첨백당 전경]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人(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1924년에 건물의 손상된 부분을 새롭게 고쳤다고 한다.
[첨백당 앞뜰의 정원수와 바같 은행나무 전경]
[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
[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 전경]
광복소나무와 1896년 재실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은행나무 근래에 세운
가선대부우공명식사적비(嘉善大夫禹公命植事蹟碑)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데레사
2018년 5월 10일 at 7:37 오전
고가에 가보면 배치나 구도가 탄복할만치
과학적이지요.
옛 사람들이 현재의 사람들 보다 지혜로웠나
봐요.
이런 집들이 계속 잘 보존되기를 바라고 싶어요.
초아
2018년 5월 10일 at 7:20 오후
맞아요.
정말 탄복할 정도로 과학적이며
직선인듯 은근한 곡선의 아름다움에 놀라곤 합니다.
돌로 만든 탑은 또 어떻구요.
탄복할정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