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06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전경]
대구시 동구 屯山洞(둔산동)에 있는 옻골마을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오목하다고 옻골이라고
불리웠다는 이야기와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 옻골 또는 漆溪(칠계)라고도
불리웠다는 두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백불고택 인증 안내문]
[百弗古宅(백불고택) 현판]
현판 글씨는 종손의 부친 崔秉瓚(최병찬)의 글씨라 합니다.
[百弗古宅(백불고택) 전경]
조선중기 학자 催東集(최동집)이 1616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주 최씨 종가인 백불암고택은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입향조인 최동집의 손자 최경향이 1694년에 지은 고택으로 대구지역 가옥중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이다.
[백불고택 우측 전경]
안채, 사랑채, 報本堂(보본당, 재실), 大廟(대묘, 큰 사당),
別廟(별묘, 불천위를 모신 사당), 대문채, 포사(제수를 준비하던 곳),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종가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별도의
구역을 가지고 종택이라는 한 공간 안에 존재하면서 멸실되지 않고 각 고유의
공간을 유지한 채 현존하는 희귀한 예를 갖고 있는 가옥이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어있다.
[백불고택 좌측 전경]
백불암은 조선 후기의 학자 崔興遠(최흥원, 1705~1786)의
호로서, 본관. 경주, 자. 太初(태초) 또는 汝浩(여호)이다.
18세에 생원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25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을 칠계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면서,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 교화에도 힘을 쏟았기 때문에 흔히 漆溪先生(칠계선생)으로 불리어졌다.
[報本堂(보본당) 일각문과 안내판 전경]
그는 학문적으로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
南野(남야) 朴遜慶(박송경)과 더불어 ‘嶺南三老(영남삼노)’로
추앙되면서 영남의 유림사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이기설에만 매몰되어 있던
학자가 아니라 經濟之士(경제지사)로 평가되는 학자였다.
백불암파 가문은 경주최씨 匡靖公派(광정공파)로서
조선 후기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다.
[報本堂(보본당) 안내판 글]
[報本堂(보본당) 현판]
[報本堂(보본당)]
報本堂(보본당)은 대구의 대표적인 실학자 최흥원이
柳馨遠(유형원)의 磻溪隧錄(반계수록)을 최초로 교정한 곳으로 유명하다.
[보본당 옆 한옥체험 일각문]
영조 46년(1770) 磻溪隧錄(반계수록)을 간행하라는
왕명에 따라 조정대신들이 최흥원을 교정과 간행의 적임자로 천거하자
경상감사 李彌(이미)의 의뢰를 받은 최흥원이 66세에 보본당에서 교정한
사실이 歷中日記(역중일기)에 실려 있다.
[보본당 아래쪽 한옥 체험 가옥]
1616년 조선시대 학자인 최동집이 세운
모실과 보본당과 사당 등은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가묘와 별묘의 祠堂(사당) 2동이 각각 일곽의 흙담장 안에 배치되어 있다.
[사당]
백불암 선생의 불천위 사당인 대묘는 1711년에 세워져
가묘로 이용되고 있는데, 1737년에 지어진 대암 선생을 모신
별묘와 함께 종가의 동쪽에 배치되어있다.
不遷之位(불천지위) 또는 不?位(부조위) 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祠堂(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神位(신위)를 말한다.
특별히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不?廟(부조묘)라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奉祀(봉사)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보본당에서 담은 백불고택 옆 전경]
[사랑채와 보본당에서 안채로드나들는 일각문]
[안채 좌측 전경]
이 건물은 대암 선생이 1630년에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의 특성을 고려해 사랑채와 함께 서쪽에 배치하였다.
[안채 우측 전경
‘ㄷ’자형의 안채 본채의 내림마루 지붕이 좌우익랑채
용마루지붕과 연결되어 우리 한옥 지붕의 美(미)가 극치에 달한다.
[崇慕閣(숭모각) 전경]
사랑채 서쪽의 崇慕閣(숭모각)에는 2003년 대구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된 종가소장전적 2종 664점을 보관하고 있다.
[닫힌 숭묘각 출입구 전경]
종가에는 이외에도 방대한 양의 문적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조선후기 대구지역 양반들의 생활상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종가 뜰에 활짝 핀 백작약 애니메이션 편집]
[안채로 통하는 중문 전경]
[숭묘각 옆 종택 뜰]
[안쪽에서 담은 종택 대문과 행랑채 전경]
마을의 일부 주택들은 현대식으로 개축되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고택과, 옛길, 전통 양식의 돌담은 옛 양반가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둘러 보기에 손색이 없는 듯 하다.
데레사
2018년 5월 28일 at 8:28 오전
경주최씨 종택이 대구에도 있군요.
저 큰집 지금은 관리하기도 벅찰거에요.
대부분의 종택들이 개방을 하면서 식혜나 떡 같은것을 팔더라구요.
그걸로 유지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집엘 가면 꼭 사먹곤 해요.
이댁도 아마 후손들이 힘들거에요.
그래도 개방을 해주시니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초아
2018년 5월 28일 at 9:51 오후
예, 대구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괸리가 쉽지는 않겠지요.
더구나 이렇게 공개하는 곳은 더 어려울거에요.
음식을 만들어 팔지는 않지만, 저곳도 개방도 하고,
고택체험도 하는곳이에요.
불편함을 부릅쓰고 개방을 해주셔서 너무 고맙죠.
저같으면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