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미대동 盛才書堂(성재서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대구 유형문화재 제9호

DSC08188[盛才書堂(성재서당) 가는 오솔길]

팻말을 보고서도 늘 지나쳐 다니기만 한 성재서당 오늘은 들려보기로 하였다.
마을 안길을 따라 구비 돌고 돌아 좁은 오솔길
가도 가도 길은 험해지고 좁아지고 성재서당은 어디쯤에 있는지
갸름을 할 수가 없다.

팻말 표시에는 얼마 되지 않은것 같았는데…
드디어 성재서당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
산속이지만, 제법 주차할 공터가 넓다  주차를 해 놓고 성재서당으로 향했다.

DSC08195[盛才書堂(성재서당) 전체 전경]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가는 길을 따라 약 2km정도 거리에 있는
미대 마을에서 북쪽의 三麻山(삼마산)을 향해 1.5km 가량 올라가면
동쪽을 팔공산 계곡물과 접하고 사방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에 남서향으로 서당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1984년 7월 유형문화재 제9호 지정.
근년에 비각 보수, 지붕갈기, 뒷면 기단 보수, 담장 보수와 살림집 1동 신축 하였다.

DSC08158[성재서당 일각문쪽 전경]

조선 인조 때의 선비 蔡明輔(채명보, 1574∼1644)가
亭子(정자)를 짓고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뒤 후손들이 채명보의 높은 德行(덕행)을 널리 기리기 위해
새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盛才書堂(성재서당)으로 바꾸었다.

DSC08169[일각문에서 담은 성재서당 뒤쪽 전경]

채명보는 蔡應麟(채응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는 先見(선견), 자는 明輔(명보), 호는 兩傳軒(양전헌)이고 본관은 인천이다.

DSC08168[일각문 쪽에서 담은 성재서당 평대문 전경]

어려서부터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芝山(지산) 曺好益(조호익, 1545~1609)과
조선 중기의 학자인 鄭逑(정구, 1543~1620)의 門下(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광해군 9년(1617)에는 生員試(생원시)에 합격하였다.

DSC08160a[盛才書堂(성재서당) 현판]

1618년에 仁穆大妃(인목대비)의 西宮幽閉事件(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上疏(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DSC08159[좌측에서 담은 盛才書堂(성재서당)]

인조 2년(1624) 인조반정의 論功行賞(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李适(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鄕兵(향병)을 모집하고 軍糧米(군량미)를 수집하였다.

1626년에는 禧陵參奉(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곧 귀향하여 이곳에 盛才亭(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지냈다.

DSC08164[우측에서 담은 盛才書堂(성재서당)]

DSC08163-1[안내판 글 내용]

DSC08163-2[안내판 영문 글 내용]

서당 건물은 화강암 바른층쌓기로 높게 축대를 2단으로
설치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이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가운데
계단이 있어 이곳으로 오르고 내리게 돼 있다.

DSC08167[盛才書堂(성재서당)]

구조는 자연석 기초 위에 전면에만 圓柱(원주)를 세운 민도리집으로
우물마루를 깐 대청 위에는 오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형태이다.

아래는 서당내부 정면에 걸려있던 편액들을 아래에 올려봅니다.

DSC08161

DSC08165

DSC08166a

DSC08170[서당에서 내려다 본 평대문]

聯芳集(연방집)은 先親(선친) 應麟公(응린공)과
兩傳軒(양전헌)의 文集(문집)인데 이의 刊行時(간행시)
使用(사용)했던 木版刻(목판각)이 아직도 보관되고 있다.

DSC08175[서당 내부 좌측에서 담은 편액]

DSC08176[서당 내부 우측에서 담은 편액]

DSC08177[서당 내부 정면에서 담은 편액 전경]

DSC08179[서당에서 내려다 본 평대문]

DSC08183[盛才書堂(성재서당)]

건물 네 귀퉁이에 活柱(활주)를 세워 팔작지붕 홑처마를 받치고 있다.
건물 전면과 좌우면에는 난간을 세웠는데 귀퉁이는 각을 한 번 더 잡아완만하게 처리했다.

DSC08184[盛才書堂(성재서당) 일각문(협문) 전경]

DSC08185[뒤에서 담아 본 盛才書堂(성재서당) 전경]

DSC08189[兩傳軒蔡先生遺墟碑(양전헌채선생유허비각) 전경]

方形一廊(방형일랑)의 토담으로 둘려쌓인
비각 안에는 兩傳軒蔡先生遺墟碑(양전헌채선생유허비)가 있다.

이 비각을 왼쪽에 두고 계단을 오르면 삼칸 대문 채의
御間(어칸)에 있는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건너 서당이
높은 축대위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마당의 앞 좌우에 요사채가 있다.

DSC08191[비각 앞쪽에 세워놓은 성재서당 표석]

DSC08192[兩傳軒蔡先生遺墟碑(양전헌채선생유허비)]

DSC08193[兩傳軒蔡先生遺墟碑(양전헌채선생유허비)]

DSC08187[兩傳軒蔡先生遺墟碑(양전헌채선생유허비각) 전경]

내려오는 길은 같은 길인대로 훨씬 빠르다.
꼭 같은 길이 축지법을 쓴것도 아닌데, 빠른것은
답사를 마쳤다는 기쁨 때문인것 같다.

다른곳 답사를 다닐때도 늘 느끼는 것은
갈 때보다 집으로 오는 길이 훨씬 빠르다는거다. ㅎㅎ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