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22-1

20180601_150831[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 전경]

한말 호남지역 의병장 鹿泉(녹천) 고광순(1848~1907)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대제를 마지하여 녹천 고광순의사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과 사당을 지었다 한다.

20180601_150826[녹천 고광순 의사 기념관]

본관 長興(장흥). 초명 高光旭(고광욱) 또는 高光珣.高光詢(고광순).
자 瑞伯(서백), 호 鹿川(녹천). 전라남도 담양 출신. 생부 高鼎相(고정상),
양부 高慶柱(고경주), 항일투사 奇山度(기산도)가 사위이다.

20180601_150851[관리사무소]

구한말 의병은 전. 후기로 구분하는데,
전기는 1895년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후기는 을사조약 체결 후에 일어났다.

호남에서 전기 의병은 장성의 松沙(송사) 奇宇萬(기우만)이 주도하여 일어났고
녹천은 당시 기우만 의병에 참여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후기 의병을 일으킨다.

20180601_150912[안내판]

고광순의사 기념관 안내문이거나 안내도 같은데….
오래 방치해 둔 탓일까?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 탓인지 어떤 흔적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ㅠ.ㅠ

기념관이거나, 어떤 것이 되었던 만들고 세우는것 보다는
그 후의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며…
후손으로써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20180601_150924[높다란 둔덕위 담에 세운 기념관건립 조감도]

20180601_150924a[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건립 조감도]

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건립 조감도 역시…
한낮의 햇볕은 쨍쨍 내리쬐이고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답사길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지만,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20180601_150941[관리사무소]

녹천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내건 기치 가운데
하나가 ‘家國之讐(가국지수)를 갚자’였다.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는 내용이다.
녹천에게 일본은 국가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원수이기도 하였다.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고인후는 그의 12대조와 11대조였던 것이다.

20180601_151002[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 전경]

왜경은 의병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창평에 있는 그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녹천은 고인후의 11대 종손이므로, 종가와 집안의 유물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된 것이다.

20180601_150957[녹천 고광순의사 기념관]

녹천은 의병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유격전을 펼치다
지리산 燕谷寺(연곡사)에서 1970년 10 17일(음력 9월 11일)
이른 새벽 부하에게 의병명단과 불원복기를 가지고 빠져나가
훗일을 이르라 보내고 구식무기에다가 중과부적으로 의병 13인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전투가 잠시 멎자 대장과 동료의 시신들이 불길에 훼손될까
염려하여, 농사꾼을 시켜 시신을 모두 절의 채마밭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솔가지로 시신을 덮고는 나흘 뒤인
9월 15일 상포를 마련하여 그 자리에 임시로 무덤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고,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선조 고경명의 나이도 60세였다.

315년 간격으로 조상과 후손이 똑같은 나이에
의병으로 나섰다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것이다.

이후에도 그의 의병들은 그의 뜻을 따라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不願復(불원복)’이 쓰인 국기,
즉 복원복기를 이어 받아 흩어지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不遠復(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 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합니다.

20180601_151119[담 너머로 담은 사당 전경]

녹천이 전사한 후 임시로 묻은 다음날인 9월 16일,
구례의 梅泉(매천) 黃玹(황현)이 이곳을 찾아 곡하고,
부근의 인부들을 모아 봉분을 크게 올린 후에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梅泉(매천) 黃玹(황현, 1855~1910)은 한말의 위대한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우국지사이다.

哭義兵將鹿川高公戰死(곡의병장녹천고공전사)
의병장 녹천을 애도하노라.

千峯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수많은 연곡의 봉우리 울창한 속에서
小劫虫沙也國殤(소겁충사야국상)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 위해 싸우다 죽어 갔구나.

戰馬散從禾壟臥(전마산종화농와)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 따라 널려 있고
神鳥齊下樹陰翔(신조제하수음상)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내려앉을 듯 돌고 있구나.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나 같은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불가당)
이름난 가문의 명성을 따를 길 없나니.

獨向西風彈熱淚(독향서풍탄열루)
가을바람 속에 홀로 뜨거운 눈물 뿌리는데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
국화 옆에 새 무덤 하나 우뚝 솟아났구나.

“나 같은 글만 아는 선비 두었다 무엇에 쓸거나!”하며
매천은 지나날 당신 처사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을 뿌렸던 것이다.

20180601_151204[담 너머로 담은 사당]

이는 녹천이 지난 8월 11일 연곡사에 들어오고 나서 며칠 뒤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격문을 하나 써서 더 많은 군사를 모집할 생각으로,
구례에 사는 당대의 명문장가 매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뜻을 말하고
격문 한 장 초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매천은
“오늘날의 정황은 격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오직 더 노력하여 또다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며 그냥 빈손으로 사람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녹천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괴감이 들며 자신의 文弱(문약)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런 매천도 삼년 뒤에 경술국치를 당하고는 더 이상
글만 아는 선비 될 수만은 없어 絶命詩(절명시)’
남기고 녹천의 뒤를 따라 자결로 순절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을 아는 선비 노릇 어렵고 힘들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20180601_151403[기념관 입구쪽 옆으로 건립중인 건물]

이곳으로 옮겨 지으려하는지, 아니면 다른 용도의 건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새로운 건물이 완성단계에 있는것 같다.
짓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후 관리에 더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 본다.

20180601_151504[새 건물 뒷쪽으로 보이는 뾰족한 기념탑]

새 건물 뒤쪽으로 보이는 뽀족하게 솟아 있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잠시 답사를 뒤로 미루고 올라보기로 했다.

스쳐 지나쳤으면 안될 중요한 길이 길이 마음에 새겨 기억해야 할 곳이었다.
새로운 포스팅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보훈의 달인 6월을 마지하여 호국영령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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