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20180601_153121[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전경]

조선시대 5란 이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인좌의 난’을 말한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구했던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혼탑이
2015년 3월 26일 전남 담양군 청평면 유천리 월봉산 아래
역사공원에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호국 충혼탑을 세웠다.

20180601_153129a[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임진 정류 왜란의 이순신(1545~1598)

본관 德水(덕수). 자 汝해(여해). 아버지 貞(정)이며,
어머니는 草溪卞氏(초계 변씨)러 守林(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째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 조인 邊(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据(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안내석 글 옮겨 적음)

20180601_153146a[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명언

勿令妄動(물령망동)하니 靜重如山(정중여산)이라
가벼이 움직이니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 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격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시 후 공포심과 전쟁 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하신 내용이다.

必生卽死(필생즉사)하면 死必卽生(사필즉생)하니라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명제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 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각오의 말씀이다.

원문은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을 두렵게 한다.’라는 말도 있다.

今臣戰船(금신전선)하니 尙有十二(상유십이)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십이 척이 있으니이 말씀은 칠천량해전 이후
다시 통제사로 재임명 고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라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라는 임금의 밀지에 수군을 없애서는
안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 내용이다.

원문은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안내석 글 옮겨 적음)

20180601_153214a[정묘호란]

이순신 장군의 명언

此獸若際(치수약제)하면 死卽無憾(사즉무감)이로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임진왜란 중 최후의 전선인 노량해전을 앞둔 1596년 11월 18일
밤 12시가 지날 무렵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피우면서,
겨레의 생명과 나라의 보존을 위한 최후의 염원을 담아 하늘에 빌었던
내용으로 충무공의 ‘결사보국’ 정신의 말씀이다.

前方急(전방급)이다. 愼勿言我死(신불언아사)하라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1598년 11월 19일 아침 마지막 노량해전의 대 격전 중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뱃머리에서 독전하던 공의 왼편 겨드랑이를 맞혀
공께서 전사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애국의 유언’이다.

誓海魚龍動(경해어룡동)하니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이랴
‘바다에 맹세하니 어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 말씀은 이충무공전서 15권에 실린 ‘진중음’으로 임금의
피난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말씀이다.(안내석 글 옮겨 적음)

20180601_153225[정면에서 담은 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전경]

丁卯胡亂(정묘호란) 인조 5년(1627)

1627년(인조 5년)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정묘년에 오랑캐(호가)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원래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펴며 신흥 강대국 후금과의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1623년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는데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 침략을 건의했다.  이를 빌미로 후금은 1627년 1월 군사 3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지방을 침략했다.

조선은 결국 다 달 만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후금을 형의 나라로 대접했다. 그러나 아직
명나라의 힘이 커서 후금은 조선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고
다만 형식상으로 항복을 받아 내는데 그쳤다.(안내석 글 옮겨 적음)

20180601_153059a[충혼탑 쪽에서 담은 앞쪽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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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호국충혼탑은 조선 5란 은
임진왜란(1592),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이인좌의 난(1728) 등 오란 때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2143위를 추모하기 위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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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에서도 호남의병 6천 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 부자를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의
호남의병이 진주성을 사수하여 향토를 지켰고, 함경도의 정문부와 의병을 총지휘한
김덕령을 따라 고장과 나라를 지킨 이들이 모두 호남인들이었다.

20180601_153234_Burst01a[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20180601_153312[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2015년 3월 26일 전남 담양군 청평면 유천리 월봉산 아래
역사공원에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호국 충혼탑을 세웠다.

20180601_153011[충혼탑 뒤편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명단]

20180601_153014[충혼탑 뒤편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명단 우측 전경]

20180601_153041[충혼탑 뒤편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명단 좌측 전경]

20180601_152940[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호국충혼탑 전경]

315년 간격으로 선조인 고경명 의사와
후손인 고광순 의사는 같은 나이에 전사하셨다 합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광순 의사는 고인후, 고경명 의사의 후예이기도 하구요.

20180601_153354a[머릿돌]

선조님들의 피와 목숨 값으로 지켜준 우리나라 대한민국
충혼탑 뒤편 광주, 전남 조선 5란 충의사 명단에
빼곡히 적힌 선조님들의 이름이 후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년 6월 7일 at 7:39 오전

    멀리 가셨네요.
    건강 좋아지신것 반갑고 기뻐요.
    이렇게 지켜온 내사랑 하는 조국, 만에
    하나라도 또 속아서는 안돼죠.
    이 땅에 평화정착을 위해 기도밖에 할게
    없지만 늘 불안불안 해요.

    • 초아

      2018년 6월 7일 at 8:14 오후

      아직은 건강이 돌아온건 아니지만,
      그동안 너무 오래 집에서 지냈기에..
      조금 나아지니 갑갑했던가봅니다.
      한달에 한번이나 두번정도는 기분전환도 할겸
      나가자 해서 다녀왔습니다.
      평화정착을 위해 저도 함께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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