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南慈賢志士(남자현지사) 抗日殉國碑(항일순국비) 전경]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南慈賢(남자현) 지사는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1873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南珽漢(남정한)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小學(소학)과 大學(대학)을 통달하였다.
19세에 金永周(김영주)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여사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決死報國(결사보국)을 결심하고 英陽義兵將(영양의병장) 金道鉉(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중 전사하였다 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여사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養蠶(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가 효부로도 이름이 높았다.
여사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通化縣(통화현)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殉國碑(애국비)옆에서 본 生家址(생가지)]
3.1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며 북만주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여 곳에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과 여성계몽을 고취시키는 운동에 힘썼다.
어려서부터 유학과 그리스도교에 정통하였다.
[생가지 삼문 전경]
전설적인 여성 무장투쟁가 南慈賢(남자현) 47세란 고령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남자 못지않은 배짱과 지혜로 무장투쟁과
군자금 조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만주땅의 무장운동세력들이 당파싸움으로 궁극의 목표를 잃고
헤매고 있을 때 혈서로서 단합을 이뤄낸 신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본채 전경]
1925년에 朴靑山(박청산)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제등실)’
총독을암살하려고 본국에 잠입하였다가 실패하여 다시 만주로 망명하고,
1932년 國際聯盟調査團(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卿(경)이 하얼빈‘哈爾濱(합이빈)‘에
왔을 때 왼손 無名指(무명지)를 끊어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끊어진 손가락 마디를 함께 싸서 보내어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본채에서 담은 본가 삼문 전경]
사대부 여인에서 만주의 여걸로 남자현이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1956년 출간된 ‘독립혈사’의 ‘남자현 여사 약전’은
그가 남편이 순국한 후 삼대독자인 유복자를 키우며, 시부모님 봉양에
정성을 다해 효부로 표창됐다고 전한다.
여염집 사대부 여인들 이상으로 봉건 규범에 순응해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시대는 남자현의 삶을 180도 바꿔 놓는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순국이 사실상 그의 애국심을 키운 자양분이되었던 셈이다.
[追慕閣(추모각) 전경]
남자현은 3.1만세시위 후 곧장 만주의 김동삼을 찾아가
그가 참모장으로 있는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한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 의병의 미망인이 적지 않은 나이에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만주행을 자처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였다고, 독립기념관 김희곤 소장은 말하였다 한다.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꼽힌다.
의열활동, 사분오열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해외 항일투쟁의 성지였던 만주에서는
90여개의 한인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다.
이들은 출신지와 사상의 차이로 날을 세워 무력충돌이 잦았다.
전사한 의병의 아내 남자현 지사는 금식과 혈서로서 단합을 호소 22년 8월
마침내 남만주 17개 단체가 통합을 이루게 된다.
[追慕閣(추모각)]
그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중 두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22년 9월 참의부 중대장으로 남편의 옛 동지인 채찬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26년 4월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을 목적으로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그의 극한적인 항쟁은 결국 목숨까지도 앗아간다.
33년 만주 전권대사 부토의 암살을 모의한 것이 발각돼 하얼빈에서
체포된 그는 8월6일부터 14일간의 단식 끝에 조선인 여관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항상 죽은 남편의 피묻은 옷을 갖고 다녔으며, 중국인 노파로 변장해
장춘으로 가다, 일본 영사관 헌병에 체포됐을 때도 지니고 있었다한다.
원수의 밥은 사절이라며 끝까지 항거하다
기력이 쇠진해 숨을 거둔 것이라고 밝혔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효부, 열녀, 열사 등 지조와 도덕. 예지와 의용이 만인의 귀감이 될만한
인격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며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하여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南慈賢(남자현 1872~1933) 지사의 유언이다.
남자현은 62년 여자독립운동가로서는 최고인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데레사
2018년 8월 15일 at 9:15 오전
가슴이 먹먹 합니다. 이런분들의 피땀을 딛고
이룩된 대한민국,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억장이 무너집니다.
초아
2018년 8월 15일 at 7:51 오후
선열님들의 피땀으로 되찾은 나라
우리가 지켜야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저 역시 가슴이 아려옵니다.
나라의 앞날이 심히 염려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