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아래쪽에서 담은 야은 길재 선생 묘역 전경]
冶隱(야은) 吉再(길재) 공민왕 2년(1353)~세종 1년(1419).
고려 말 조선 초 학자. 본관 해평. 호 冶隱(야은), 金烏山人(금오산인).
아버지는 知錦州事(지금주사) 元進(원진). 어머니는 金希迪(김희적)의 딸이다.
고아읍 봉계리(현,봉한리)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 선생 묘 전경]
8세 때에 아버지가 寶城大判(보성대판)이 되어 어머니도 함께 임지로
가게 되었는데, 녹이 박하여 밥 먹기 어려우므로 외가에 맡기고 떠나게 되었다.
냇가에서 놀다가 우연히 자라 새끼를 잡았다가,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엄마 잃었니
나도 엄마 잃었단다
삶아 먹을 줄 알지마는
엄마 잃은 게 날 같길래
이렇게 놓아주노라
하며 물에 던지고 엉엉 울었다 한다.
[좌측 문인석]
11세에 비로소 冷山(냉산) 桃李寺(도리사)에서
글을 읽고 쓰고 시 짓는 법을 차츰 이해하였다.
16세에 지은 시가 있으니,
시냇가 오막살이 한가히 살 때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겨웁구나,
손님이라곤 오는 이 없고
산새들만 지저귀는데 대숲 아래
상 옮겨놓고 누워서 책을 읽네
[우측 문인석]
목은 李穡(이색), 포은 鄭夢周(정몽주), 양촌 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의 진리를 배웠다.
1374년에 國子監(국자감)에 들어가 生員(생원) 시험에 합격
특히 포은과의 만남은 장차 조선 성리학의 일대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양촌 權近(권근)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권근은 “내게 와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많지만 길재가 獨步(독보)다”
고 했으며 후일 선생으로 칭하기도 했다.
[야은 길재 선생 묘와 묘비 전경]
22세에 국립대학인 國子監(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31세에 司馬監試(사마감시)에 합격했다.
32세에 부친상으로 3년 상을 극진히 마친 길재 선생은 이후
송도의 용수산 동쪽에 거처를 마련해 모친을 모시면서 명현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이방원과 한마을에 살면서
성균관에서도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쌓았다.
1389년에 門下注書(문하주서)가 제수되었고 1390년 봄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측한 나머지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에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 牧隱(목은) 선생을 찾아가 그 뜻을 전하니 詩(시)를 지어 주었다.
그 글귀에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라 하였다.
길재 선생은 고려가 패망한 이래 조선왕조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忠臣不事二君(충신불여이군)의 절의를 지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墓碑(묘비)]
묘비에는
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之墓(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지묘)
새겨져 있다.
[야은 길재 선생 묘]
정종 2년(1400) 가을에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太上博士(태상박사)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기 않는다는 뜻을 펴니, 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묘 뒤 정면에서 담은 안산 전경]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데,
한 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묘 뒤 좌측에서 담은 안산 전경]
태종 3년(1403)에는 군수 李揚(이양)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집을 옮겨 풍족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으나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묘비 뒤에서 담은 묘앞 석물]
스승 권근, 박분 별세, 心喪(심상) 3년 상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교육과
경제적 안정을 찾은 후 書齋(서재)를 열어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書齋(서재)에는 양반은 물론 미천한
자제에 이르기까지 하루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英祖(영조) 4년(1728) 諡號(시호)를 忠節(충절)이라 하였으며,
선산 금오서원, 칠곡 오산 서원, 금산 성곡 서원, 계룡산 동학사의
삼은사에 향사하고 고려 말 포은, 목은 과 함께 三臣(3신), 三隱(3은)이라 하며
조선 유학의 宗師(종사)이다.
[묘 앞쪽에서 담은 오태동 마을 전경]
그의 문하에는 김종직의 부친인 金叔滋(김숙자)가 있어 후일
길재의 학문이 김종직에게 전해줌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확립하게 되고
절의 정신은 이후 김일손,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조식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1419년, 선생의 나이 67세로 병환이 나서
급하게 되니 부인 신 씨는 아들 사순을 불러 내려오자.
“내가 죽거든 朱文公(주문공)의 家禮(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러라” 하였다.
선생이 67세로 세상을 마치자 금오산에서 가장 긴
산줄기를 찾아 묘 터를 정하니 이곳이 바로 오태동이다.
묏자리는 용의 머리 형상인 산허리 턱으로 그 가장자리는 낙동강 가이다.
[묻혀있는 2기의 묘비]
290년, 283년 전에 세워졌다는 2기의
묘비가 길재 선생 묘역 옆 땅에 누워진 채 묻혀 있다.
그 옛날 묘비라 하는데, 왜 옛 묘비를 새우지 않고,
땅에 묻힌 채 두고, 새로운 묘비를 세웠는지 궁금하다.
[좌측 땅에 묻힌 묘비]
崇禎後九十八乙巳三月日改立(숭정후908기미3월일개립)
이라 새긴 글자가 보인다.
[우측 땅에 묻힌 묘비]
崇禎紀元九十日(숭정기원90일) 이라 적혀 있다 하는데…
희미해지기도 하였지만, 떨어진 솔잎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네요.
그렇다고 碑(비) 위에 올라가서 솔잎을 쓸어내고 읽기도 뭣하고..
사진만 담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다시 담아 본 야은 길재 선생 묘와 묘비 전경]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 성리학의 대가 야은 길재.
이들 三隱(삼은)은 호에 각각 隱(은) 자가 들어 있는대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길재 선생은 고려 말 문하주서까지 벼슬을 지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임하고 낙향해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벼슬을 받지 않고 숨어 지냈다.
[묘에서 내려다 본 오태동 마을 전경]
현재 야은 길재의 유적으로는 구미시 오태동에
동방의 백이 숙제라 하여 후학들이 1587년 글자를 모사하여
지주 증류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절의 와 밝은 학덕을 기념하고 있으며,
1983년 ‘지방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되어 후세들의 마음을 감화하고
격려하는 지주로 삼고 있다.
그 외에도 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기슭에는 선생의 유적인
採薇亭(채미정)과 求仁齋(구인재)가 있고 어필각에는 숙종 어필 어제 시가 있다.
데레사
2018년 10월 23일 at 7:26 오전
옛날 금오산 오르면서 길재선생의 흔적을
애기하면서 당시 유명했던 대구 금달네도
금오산 정기를 받았을거라고 웃기도
했지요.
구미하면 박정희 대통령 생각이 납니다.
초아
2018년 10월 23일 at 9:02 오후
어머, 언니도 금달네 아셔요?
하긴 대구에서만 유명했던게 아니라
전국적이었던 것 같아요.
참 슬픈 사연을 간직한 금달레.. 마음이 아파요.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만하여도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