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산 7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현판]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전경]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는 왕산 허위의 생가 터에
기념공원을 조성했으며, 왕산 허위의 묘와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2009년에는 왕산 허위를 기리는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모든 기념관이나 문학관 등은 매주 월요일이면 휴관이다.
모르진 않았지만, 가끔 이렇게 월요일에 들릴 때도 있다… ㅠ.ㅠ
기념관에는 들릴 수 없었지만, 기념관 옆 유허비와 묘소에는 들릴 수 있었다.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許蔿(허위, 1854~1908)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
본관 金海(김해). 호 旺山(왕산). 경상북도 구미 출생이다.
[기념관 좌측 유허비각과 묘역으로 오르는 초입 전경]
儒門(유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작은아버지 海樵公(해초공)과
맏형 舫山公(방산공) 허훈의 가르침을 받았다.
허훈은 星湖(성호) 李瀷(이익)의 학문을 이은 학자였다.
허위 형제는 1895년 민비의 시해와 단발령 소식을 듣고 각각 의병에 가담했다.
[홍살문과 유허비각 전경]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허위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
[遺墟碑閣(유허비각) 전경]
휴관일이라 그런지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조용히 관람하며, 사진도 찍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니
그 또한 좋다.
하늘도 맑고 흰 구름이 솜털처럼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은 역시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였다.
[아래쪽에서 담은 유허비각 정면 전경]
대한제국 고종은 그를 등용하여 성균관 등에 기용하였고
1904년에는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사건이 일어나자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면서 저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어 또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旺山許蔿先生遺墟碑閣(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각) 현판]
[안내판과 유허비각 전경]
허위는 이번에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이인영을 총대장을 삼아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 창의대장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였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안내판 글 내용]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앞면]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옆면]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뒤면]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옆면]
[묘소 오르는 길 전경]
그러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묘소 오르는 돌계단]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며 한일 강제 병합을 추진 중이던 일본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돌계단 위에서 담은 묘소 전경]
결국 1908년 6월 11일 양평 유동 골짜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0월 21일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사형시킨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의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묘소 안내비와 묘 앞 석물과 묘역]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왕산 허위 선생 묘소 안내비]
[안내비쪽에서 담은 우측 옆에서 담은 묘소 전경]
유학자 출신의 의병 활동가인 왕산 허위의 삶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과정과 이에 항거한 의로운 선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許蔿(허위) 선생 略史(약사)]
[旺山許蔿先生(왕산 허위 선생) 墓(묘) 묘비, 석등 전경]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구미시에서는 생가터에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旺山許蔿先生(왕산 허위 선생) 墓(묘)]
허위는 허조의 아들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 허훈은 3천 두락의 전답을 팔아 허위의
항일투쟁에 군자금을 댔고, 둘째 형 허신은 일찍 작고했으며,
셋째 형 허겸은 그의 막하에서 의병투쟁을 함께 했다.
[墓碑(묘비)]
十三道義兵總大將(13도 의병 총대장) 殉國義士(순국의사)
旺山許蔿之墓(왕산 허위 지묘) 라 새겨져 있다.
[묘소 좌측에서 담은 전경]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의병투쟁으로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묘소 옆쪽에서 담은 앞쪽 전경]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묘 뒤쪽 암석]
[묘 뒤에서 바라본 앞 전경]
사형이 집행되기 전 왕산 허위는 친필로 글을 남겼다.
유묵엔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고 씌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조국의 처지가 이러하매
너희 형제들은 내 뜻을 따라 조국 독립 투쟁에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旺山許蔿先生墓(왕산 허위 선생 묘)와 묘앞 묘비와 석등]
그의 당부대로 허위의 형제와 자손들은 한결같이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방산 허훈과 성산 허겸. 凡山(범산) 허형.
是山(시산) 許苾(허필) 등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해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잠긴 협문]
[담너머로 담은 전경]
허겸과 종반 간인 허형, 허필은 북만주로 異域(이역)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만주와 노령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담너머로 담은 전경 2]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역 하늘 아래 국제 迷兒(미아)로 살고 있다.
왕산 4형제와 4촌 형제뿐 아니라 후손도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敬仁祠(경인사)]
아마도 이곳은 왕산 허위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듯한데…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旺山(왕산) 선생의 옥중시]
[獻詩(헌시)]
[망두석]
[2기의 망두석 전경]
[돌계단]
[旺山許蔿先生遺墟碑閣(왕산허위선생유허비각) 전경]
왕산 허위 선생은 순국 직전 倭僧(왜승)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올곧은 의기와 품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평생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던 그의 우국충정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홍살문과 기념관 옆 전경]
생가터는 선생의 장손으로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허경성 씨 등
3형제가 대출을 받아 사비로 사들여 구미시에 기증한 것이라 한다.
현재 왕산의 후손이며 장손인 허경성 옹은 올해 92세로
대구 북구 산격동에 기거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후손들은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불구 지난
2005년 왕산공원 터를 구미시에 기증해 2009년에 구미시가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현재 허경성 옹은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며
자식들도 서울과 미국으로 흩어져 있어 넉넉한 살림은 아닌 것
같다고 방문한 이들은 전했다.
데레사
2018년 10월 29일 at 8:09 오전
기념관은 잘지었습니다만 후손들의 삶도 좀 보살폈으면 좋겠습니다.
구미하면 늘 내가슴에는 아픈 덩어리가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라서요.
할말은 많지만….
초아
2018년 10월 29일 at 10:50 오후
저도 그런생각을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는데…
후손들의 삶은 나라가 책임져 주는게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저도 마음이 아립니다.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뉴스를 보고 특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