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외량3리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묘소 안내석 전경]
며칠 전부터 군위에 한번 다녀오자 하기에 그러자 하였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10월 30일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군위로 향했습니다.
묘소로 오르는 임도]
어딘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남편이 가자는 대로 달려 도착한 곳은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묘소였습니다.
[입구에서 담은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묘 전경]
묘역 제일 위 쪽의 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墓(묘),
그리고 좌측 아래쪽에는 아들 李國樑(이국량)의 墓(묘),
우측 아래에는 송오 李軫(이진) 墓(묘)
남계 李輔(이보)의 墓(묘)가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아래쪽에 모신 남계 李輔(이보)의 墓(묘)부터 차례로 소개합니다.
함께 둘러보셔요.
[南溪(남계) 李輔(이보) 묘 전경]
南溪(남계) 李輔(이보, 1545~1608)
본관 延安(연안). 자 景任(경임), 호 南溪(남계).
성리학자 李軫(이진)의 아우이다.
[南溪(남계) 이선생 新(신) 墓碑(묘비)]
[南溪(남계) 이선생 舊(구) 墓碑(묘비)]
조선 선조 때 인동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펼쳐 칭송을 받았던
南溪(남계) 李輔(이보, 1545~1608)를 기리는 비석이다.
선조 37년(1604) 9월 건립
원래 구미시 황상동에 있었으나 구미 공업단지
조성으로 현 위치(구미시 시미동 산 28-1)로 이건하였다 함.
[南溪(남계) 李輔(이보) 묘비와 묘]
경상도 군위에 살았으며, 류성룡의 문인으로 경전과 성리에 밝았다.
선조 13년(1580)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金垓(김해)의
종사관으로 의병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다.
왜란 후 주민들의 추천으로 인동 현감이 되었는데
피폐해진 고을을 잘 다스려 명망이 높았다.
인동 현감으로 8년 동안 재직하였는데, 지방 수령이
이렇게 오랫동안 한곳에 머문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한다.
[南溪(남계) 李輔(이보)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인동 현감 재임 중 1595년 체찰사 李元翼(이원익)이
天生山城(천생산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2호)를 修築(수축) 할 때
그 役事(역사)를 맡아 몇 달 만에 준공 시켰다
전란 중에 현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굶주린 이들을 진휼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우측 이형례의 묘. 좌측 아들 이국량 묘 전경]
[이향례의 아들 李國樑(이국량) 묘 전경]
[李國樑(이국량) 묘비]
[李國樑(이국량) 묘와 묘비]
이분에 대해서는 찾아보았지만,
자료를 찾지 못하여 묘소 사진만 올리고 통과합니다.
[李國樑(이국량)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松塢(송오) 李軫(이진) 新舊(신구) 墓碑(묘비)와 墓(묘) 전경]
李軫(이진, 1536~16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延安(연안). 자 君任(군임), 호 松塢(송오).
군위 출신으로 일찍이 李滉(이황)의 문인이 되어
柳成龍(유성룡)과 더불어 수학하였다.
[松塢(송오) 李軫(이진) 新(신) 墓碑(묘비)]
[松塢(송오) 李軫(이진) 舊(구) 墓碑(묘비)]
[松塢(송오) 李軫(이진) 新舊(신구) 墓碑(묘비)와 墓(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좌랑으로서 閔汝慶(민여경)과
함께 의주에서 경성으로 양곡을 선박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松塢(송오) 李軫(이진) 墓(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정읍 현감으로서
순찰사 陣下(진하)에 들어가 왜적을 맞아 싸웠다.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묘소 전경]
류성룡의 조부 간성군수를 지낸 柳公綽(유송작, 1481-1559)은
李亨禮(이형례, 1448-1507)의 따님에게 장가를 갔다.
때마침 풍산류씨(서애선생의 조모)는 어느 풍수의
전하는 말이 친정의 산소 자리가 정승이 나올 명당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李亨禮(이형례) 新(신) 墓碑(묘비)]
[李亨禮(이형례) 舊(구) 墓碑(묘비)]
이황이 글을 짓고 동생 이건이 글을 쓰다.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묘소 전경]
그런데, 때마침 친정아버지(이형래)의 죽음을 접하고
그 묏자리에 가서 밤새도록 물을 길어서 부으니, 다음날 묏자리를 쓰려고
파보니, 물이 흥건하여 흉하다 해서 그 옆자리로 묏자리를 쓰니 이곳이
연안이씨의 문중 묘가 되고 그 뒤 친정 오라비한테 부탁하여 그 물이 나오는
산소를 얻어 자신들의 산소 자리를 마련하였다 한다.
[李亨禮(이형례)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러나 먼저 연안이씨(서애선생 조모)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그자리에 묻고, 뒤에 이공작(서애선생 조부)이
묻혀 오늘의 풍산류씨 묘자리가 되었다 한다.
그 풍수의 말이 정말인지 서애 선생은 정승에 올랐다.
이 이야기는 군위 일대에 널리 구전되었고, 이 이야기는
군위군지와 개인문집에 실려 있는 이야기라 합니다.
[좌측에서 담은 延安李氏軍威入鄕祖(연안이씨 군위입향조) 李亨禮(이형례) 묘소 전경]
산소 때문일까?. 外孫(외손)은 서애 류성룡과 같은
정승을 배출하였지만, 親孫(현손)은 현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松塢(송오) 李軫(이진)선생과 南溪(남계) 李輔(이보)선생이
나란히 松湖書院(송호서원)에 배향되었다.
막일꾼
2018년 12월 4일 at 7:05 오전
入向祖?
入鄕祖가 맞습니다.
초아
2018년 12월 5일 at 12:01 오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도 쉽게 하기위해 복사해서 붙이기…
그 과정에서 틀렸나봅니다.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