儉齋(검재) 金楺(김유) 신도비와 묘역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8 번지

20161014_123846[정면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묘역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神道碑(신도비)

20161014_124714[뒤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20161014_123818[옆쪽에서 담은 金楺(김유) 神道碑(신도비) 전경]

20161014_124031[신도비쪽에서 담은 儉齋(검재) 金楺(김유) 묘역 전경]

金楺(김유, 1653~1719) 본관 淸風(청풍)
자 士直(사직), 호 儉齋(검재), 관찰사 澄(징)의 아들.
朴世采(박세채). 宋時烈(송시열)의 문인.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세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161014_124126[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전경]

일찌기 학문에 조예가 깊어 朴世采(박세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宋時烈(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한다.

20161014_124152[儉齋(검재) 金楺(김유) 묘]

현종 15년(1674) 慈懿大妃(자의대비)의 服喪問題(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제2차 禮訟(예송)이 벌어져, 朴世采(박세채). 宋時烈(송시열) 등이
화를 당하자 경기도 利川(이천)에 은거했다.

20161014_124202[묘비와 묘 전경]

숙종 9년(1683)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11년(1685)
창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숙종 13년(1687)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 후 庚申換局(경신환국)에 관련되어 삭직되고
禁錮(금고)되었다가 숙종 20년(1694)에 복직되었다.

이후 호조좌랑, 호조정랑, 과천현감, 부평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20161014_124212[墓碑(묘비)]

20161014_124326[좌측에서 담은 묘역 전경]

숙종 34년(1708) 최석정과의 다툼으로 인해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결국 부교리 겸 남학교수가 되었다.

후에 벼슬이 병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영조 17년(1741) 文敬(문경)이란 시호를 내렸다.

20161014_124219[묘 앞 우측 석물]

20161014_124228[묘 앞 좌측 석물]

20161014_124359[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左贊成(좌찬성)에 追贈(추증),
瑞興(서흥)의 花谷書院(화곡서원)에 祭享(제향)되셨다.

검재 김유선생 영정[인터넷에서 모셔온 김유선생 영정(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81호로 지정)]

이 초상은 당당한 풍모에 서린듯한 백발이 위품을
더해주는 것으로서 우측 상단에 ‘검재 김유선생화상’이라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64세 시사라 기록되어 있다.

20161014_124514[묘에서 담은 신도비 전경]

纂修郞官(찬수낭관)으로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增補(증보)했다.

문헌으로 儉齋遺稿(검재유고) 小學集註(소학집주)
增補朱子外記(증보주자외기) 尊周錄(존주록)등이 있으며,
김천 봉산면 봉계출신의 매계 曺偉(조위)선생의
문집인 ‘梅溪集(매게집)’의 발문을 지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1월 15일 at 8:05 오전

    전국의 유명인 산소는 거의 다 다니셨죠?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는 근세의 유명인들
    묘소가 많은데 가보셨는지요?
    손병희 조병옥 그리고 샘각은 다 안 나지만
    많거든요.

    두 분 다니는길 늘 평안하기를 바래요.

    • 초아

      2019년 1월 15일 at 9:59 오후

      예, 아마도 그런것 같습니다만…
      아직 찾아봐야할 곳이 참 많습니다.
      서울쪽은 거의 찾지 않아서 들려보지 못하였습니다.
      복잡한 서울은 나중에 나중에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언니 고맙습니다.
      언니도 늘 건강과 평안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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