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4
[경주 향교 입구 쪽에서 담은 내물왕릉 전경]
사적 제188호. 내물 왕릉은 계림의 서쪽에 있다.
경주향교를 둘러본 후 향교 밖 좌측 안쪽에 있는 奈勿王陵鷄(내물왕릉)으로 향했다.
[내물왕릉 입구 쪽 전경]
계림은 본래 始林(시림)이라 불리었으나, 脫解王(탈해왕) 때
흰 닭이 울고 금궤 안에서 옥동자를 얻은 다음 이렇게 불리었다는 전설이 있다.
[내물왕릉 전경]
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안내판 글 내용]
[奈勿王陵鷄(내물왕릉)]
신라 17대(재위 356~402) 왕으로서 성은 김씨이며 那密(나밀)이라고도 한다.
仇道(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며, 角干(각간) 末仇(말구)의 아들이다.
[내물왕릉 앞 석물괴 묘비]
신라에서 중앙집권을 강화시킨 왕으로, 즉 진한 지역에서
강한 세력에 불과했던 신라를 고대국가체제로 확립시킨 인물이다.
[奈勿王陵鷄(내물왕릉) 묘비]
당시의 백제는 倭(왜)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 결과로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왕릉 주변 산책로]
364년 4월에 왜병이 쳐들어오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수천 개
만들어 군사로 위장하여 토함산 기슭에 세운 뒤, 병사 1, 000명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왜병을 물리쳤다.
[산책로에서 담은 내물왕릉 전경]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00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자, 그들을 받아들여 신라에서 살게 하였다.
[산책로에서 담은 내물왕릉 뒤쪽 전경]
381년 위두를 전진왕 부견에게 보내어 국교를 맺은 뒤
중국 문물 수입에 힘써 고구려를 거쳐 중국 문화를 들여오게 하였다.
[奈勿王陵鷄(내물왕릉)]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힘에 눌려 사신과 볼모를
보냈지만, 쳐들어온 왜적과 말갈을 내쫓아 나라를 지켰다.
[奈勿王陵鷄(내물왕릉)]
397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다.
[奈勿王陵鷄(내물왕릉)]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朴(박), 昔(석), 金(김)의 三姓(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金(김) 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奈勿王陵鷄(내물왕릉)]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하여 진 것이라 합니다.
[왕릉 사이로 보이는 첨성대 전경]
또한 내물왕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백제. 왜. 가야의
침략을 극복하면서 영토를 북쪽으로 강릉까지 확대시켰다.
그는 47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4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주시에서 운영하는 비단벌레 차]
歷史(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遺蹟 地帶(유적 지대)로,
주변에는 경주 향교,(鷄林(계림), 月精橋(월정교), 瞻星臺(첨성대) 등
重要(중요) 한 遺蹟(유적)들이 散在(산재) 해 있다.
경주 시내를 운행하는 비단벌레 모양의 전기자동차
비단벌레차는 정원 22명을 태우고 계림-최 씨 고택-교촌마을
-월정교-월성 홍보관 등 2.9km를 하루 15회 운행한다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거나, 시간이 넉넉하시다면
비단벌레차를 타고 둘러보시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중간중간 문화재 소개도 해주며 둘러볼 시간도 준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