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역사관 전경]
그곳의 문화를 알아보려면 박물관을 들리면 자세히 알아볼 수 있지요.
경주를 여러번 수도 없이 들렸으나, 박물관은 늘 통과했습니다.
물론 저야 늘 가고 싶었지만, 함께 하는 옆사람이 다른 곳 보기를 더 즐겨해서
늘 시간이 바쁘다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신라역사관 출입구 계단]
이번 경주 여행길에 따뜻한 줄 알았던 기온이 갑짜기 내려가서…
추위에 왕릉이나 문화재 탐방도 하긴 하였지만, 바깥이라
박물관에 들려보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가고 싶어?”
“네”
“그럼 가자.”
마음이 바뀔까봐서 얼른 쌩하니 달려 박물관 주차장 도착
[신라역사관 전시실 출입구 전경]
어렵게 주차를 해 놓고 여기서 기다릴께 다녀와 하는
남편의 말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빨리 하였다.
한곳이라도 더 둘러보기 위해서~
[신라 역사관 안내 도]
신라역사관에는 1실~4실까지 나뉘어 유물을 전시해 두었다.
1실 신라의 건국과 성장 부터 소개하겠습니다.
[1실 신라의 건국과성장]
제1실은 아득히 오래된 구석기시대부터 5세기 말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돌도끼를 쓰던 경주 일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사회ㆍ정치적으로 점차 성장해 국가를 세웠는지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건국 이후 천년왕국의 기틀을 다져간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와 노가 출토된
울진 죽변리 출토품(기원전 약 6,000년),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과
구어리 1호 무덤 일괄품, 경주 황성동 새(올빼미)모양 토기, 경주 교동 금관,
미추왕릉지구 토우장식 긴목항아리(국보) 등이 있습니다.
(경주국립박물관 홈의 글 옮겨적음)
[우측 울주반구대암각화]
‘신라’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문화재로서는 박물관의
화려한 금관이나 성덕대왕신종, 경주의 작은 산과 같은
왕릉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인물로서는 박혁거세,
선덕여왕, 김유신, 원효대사 같은 분들을 떠올리시겠지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 676년에
삼국을 통일한 뒤 935년 고려에 흡수될 때까지 약 천년을 이어온 왕국
입니다. 그 수도는 줄곧 지금의 경주였습니다.
이처럼 한 곳을 수도로 해서 오랫동안 왕국을 유지한 나라는
전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뭅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떻게 나라를 세워
발전하였고 삼국을 통일했으며 천년게 가까운 기간 동안 번성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바로 여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안내글 옮겨 적음)
[울주반구대암각화]
[신라 연표]
[도구를 만들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 나무, 뼈와 뿔 등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구석기시대의
도구들은 대부분 돌을 깨뜨려 만든 석기들입니다.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들은 쉽게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석기시대 처음에는 큰 석기를 만들어 다용도로 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러 가지 쓰임새에 맞도록 작고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기인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전문적 기능을 지닌 여러 가지의
석기들이 나타났습니다.
약 4만 년 전부터는 혼펠스, 규질혈암[셰일], 응회암 같은 고운 입자의
새로운 돌을 재료로 다듬어 만든 돌날[石刃]을, 2만 5천 년 전 무렵부터는
작은돌날[細石刃]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 나무, 뼈와 뿔 등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구석기시대의
도구들은 대부분 돌을 깨뜨려 만든 석기들입니다.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들은 쉽게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석기시대 처음에는 큰 석기를 만들어 다용도로 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러 가지 쓰임새에 맞도록 작고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기인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전문적 기능을 지닌 여러 가지의
석기들이 나타났습니다.
약 4만 년 전부터는 혼펠스, 규질혈암[셰일], 응회암 같은 고운 입자의
새로운 돌을 재료로 다듬어 만든 돌날[石刃]을, 2만 5천 년 전 무렵부터는
작은돌날[細石刃]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석기인은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냥도 하였지만,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에 따른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작살과 이음낚시를 사용해 고래 등의
동물과 상어 등의 큰 물고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땅을 일궈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이 주는 그대로 먹는 게 아니라, 조나 기장 덩의 특정한 식량을
생산하여 먹기 시작하게 된 이러한 농경의 시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좀더 오랫 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땅을 일구고 이삭을 거두는 데 필요한 괭이, 낫 등의 농공구 등을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찰절흔석기, 찰절도구, 돌도끼, 숫돌, 모룻돌, 간석기]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들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의 일부 또는 전체를 숫돌에 갈아서
도구를 만든 磨製技術(마제기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돌과 뼈 등을 깨뜨려 도구를 만드는 打製技術(타제기술)을 사용한
구석기시대와는 큰 차이입니다. 마제기술은 도끼, 칼 등 석기의 날을
세우거나 뼈 연모와 꾸미개를 만드는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울진 죽변리 유적에서는 간석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 석재,
석재를 자르는 도구, 숫돌, 모룻돌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석기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농경사회로 들어서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농경이 널리 퍼지고 정착 생활이
본격화되면서 큰 마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괭이, 도끼 등으로 논밭을 일구어 벼, 조, 수수, 콩,
보리 등의 농사를 지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농경 도구로서 곡물을 거두는 데 쓴
반달돌칼과 돌낫이 있습니다. 돌뿐 아니라 나무를 재료로 만든
농경 도구도 널리 쓰였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나무를
가공하는 데 쓴 자귀, 끌, 대팻날 등이 많이 발견됩니다.
[1. 돌도끼 2. 돌자귀 돌대팻날. 끌 ]
[전시된 청동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 토기 전경]
[청동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 토기]
[전시된 유물]
[돌화살촉]
[간돌검]
[돌창, 바퀴날도끼]
[한국식동검을 사용하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대표적인 동검의 형태에 따라
전기의 요령식동검 문화와 후기의 한국식동검 문화로 나누고 있습니다.
한국식동검 문화는 기원전 5~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청동기 문화입니다.
이 시기의 청동 제품으로는 앞 단계의 요령식동검보다 폭이 좁은
한국식동검을 비롯해 투겁창, 꺾창과 같은 무기류와 거울, 방울 등의
의기류가 있습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당시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1세기에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신라는 이 새로운 금속 문화를 기반으로 건국되었습니다.
[전시된 자료]
[유리목걸이, 팔지, 반지, 호랑이모양띠고리, 청동띠고리]
[전시된 자료]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
[경주 구어리 1호 덧널무덤]
[갑옷 류]
‘삼국사기’에는 이사금 시기의 사로국이 이웃의 음즙벌국.
압독국, 감문국 등을 공격하여, 병합한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로국이 그러한 군사 행동으로 이웃 나라들을 아우름으로써
더욱 큰 나라로 성장하였음을 말해줍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국보다 월등한 무기들이 필요했기에 쇠로 만든 긴 칼과 창 등
강력한 철제 무기들을 만들었습니다.
또 전투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쇠로 갑옷도 만들어 입었습니다.
[갑옷 류]
[투구]
[신소재 철을 마음대로 부리다.]
신라가 성장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바로 ‘鐵(철)’이었습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은 당시 최고의 기술이었고, 철을 가진 세력은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철은 돈처럼 사용되었고 이웃 나라들과의 주요 교욕 물품이었습니다.
사로국이 철을 마음대로 다루어 활발히 이용한 증거는 1~4세기의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쇠도끼 등을
만드는 주조 작업과 쇳덩이를 불에 달궈 모루에 대고 두드려 철기를 만드는 단조
작업을 한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이는 사로국이 높은 수준의 철제품 생산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수정목걸이]
[목걸이]
[오리모양토기 3세기 경주 덕천리]
[토기류 전시]
[박물관 내부 관람객]
가족과 친구와 또는 단체로 들리는 사람들로 늘 분비는 곳
오늘도 역시 많은 관람객들도 붐비기에 한차례의 관람객이 지나간 후
살짝 살짝 틈이 생길때마다 담느라 조금 힘도 들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 때문에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왕 들어왔으니 샅샅이 둘러보고 가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신라인, 금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금목걸이 금바리, 금귀걸이, 금구슬, 금달개]
[경주 월성로 가-13호 무덤 출토품]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과 은, 채색이 많은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은 신라가 고대 국가로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마립간 시기(4~6세기)
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립간(왕)은 금관을 쓰고, 금허리띠를
찼습니다. 금귀걸이는 물론 반지와 팔찌를 끼었고 금 장식과 구슬을 꿴
목걸이 및 가슴걸이를 걸쳤습니다.
신라에서 언제부터 금을 사용하였고 어디에서 구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4세기 중후반 무렵의 경주 월성로 가-13호 무덤에서 금으로 만든 아주
세련된 목걸이, 귀걸이와 그릇 등이 나온 점으로 보아 4세기 초부터는 금을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짚신모양토기, 상서로운 동물 장식 그릇, 토우장식뚜껑 등]
[신라 토기가 널리 퍼지다.]
신라 토기는 밀폐된 굴가마에서 1,000도C가 넘는 고온으로
구워내 매우 단단한 회청색의 토기입니다.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잔 등 토기의 종류는 가야 토기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가야 토기에 비해 직선적이며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거나 흙으로 빚은 작은 인형이나 동물인
토우를 붙여 장식한 것이 많습니다.
신라의 영토로 새로이 편입된 지역들에서는 중심지인 경주 지역의
토기를 본떠서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신라 영토 안에서는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양식의 토기들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토우장식항아리]
1973년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을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목긴항아리에 사람과 자연의 생명체를 주제로
한 다양한 형상의 토우를 부착하여 최대의 장식효과를 낸 신라의
가장 대표적인 토우장식토기입니다.
항아리의 목과 어깨부분에는 개루리의 뒷다리를 물고있는 뱀과
오리모양 토우를 세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性器(성기)가 강조된 남자, 신라금을 타고 있는 사람, 물고기, 새, 거북
등의 토우를 장식하였습니다.
순간 포착된 생동감과 진흙의 투박함이 넘치는 이러한 장식토우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조형물로서 신라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저울, 금동말띠꾸미개, 연유단지, 굵은고리금귀걸이, 금동신발, 은합, 글씨가 있는 청동합]
[校洞金冠(교동 금관)]
경주의 교동의 한 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 압수된 금관입니다.
지름의 비교적 작은 곤태에 3개으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세웠습니다.
이 장식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산山자 모양의 나뭇가지와는 달리
비교적 사실적인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곤태나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금관들과는 달리 전 무늬 또는 물길 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지금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 금관
(금관총, 금령총, 시봉총, 교동,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크기도 가장 작은 이 금관은 마립간 시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쓴 글은 안내판의 글 내용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1전시실 내부에서 담은 전경]
경주국립박물관은 1실에서 5실까지 볼거리가 너무 많다.
1실(신라의 건국과 성장) 2실(황금의 나라 신라)
3실(강력한 중앙집권 왕국) 4실(신라의 융성과 멸망)
1실에서 ~4실까지 나누어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오늘은 1실(신라의 건국과 성장) 소개를 마칩니다.
데레사
2019년 3월 4일 at 7:55 오전
아니 아직도 남편의 허락을 받다니 정말
현모양처 입니다.
그 나이쯤되면 대부분 해방되는데…
경주박물관, 학창시절 하도 많이 다녀서
요새는 안 갔거든요.
경주가면 한번 가봐야 겠어요.
초아
2019년 3월 4일 at 10:00 오후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현실입니다.
그러나, 제긴 이때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일상이 되어버려서 그게 더 편합니다.
대구 박물관은 제가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지만,
경주 박물관은 혼자는 힘들어요.
그날도 다른 곳을 둘러보기위해 갔었는데..
다행히(?) 날씨 덕을 본 것입니다.ㅎ
마음대로 못하지만…
그래도 오랜세월 이렇게 살아왔기에
불편하진 않고 그냥 당연한 일인양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