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역사관 4실(신라의 융성과 멸망)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20190126_122446[신라역사관 4실 입구 전경]

20190126_122452[4전시실 안내도]

신라는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치면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합니다.

통일 후, 안정된 사회에서 세련되고 화려한 통일 신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8세기 후반부터 혼란기가 시작되면서 신라의 국력은 점차 쇠약해졌습니다.

결국, 왕건이 세운 고려(918~1392)에 항복하면서 신라도 멸망합니다.
4전시실 대표 전시품으로는 사천왕사 녹유사천왕전, 원화십년명 뼈항아리,
문무왕릉비편 등이 있습니다.

20190126_122459[신라왕경 모형 전경]

20190126_122506[경주 왕릉과 유적지 안내도]

20190126_122518[신라왕경 모형]

20190126_122546[전시실 내부 전시된 유물]

문무왕(재위 661~681)은 무열왕(재위 654~661)의 첫째 아들입니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兵部令(병부령)을 역임하다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무열왕을 따라 백제 정벌에 나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힘을 쏟았고,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당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이십 여 년 동안 이어진 통일 전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문무왕은 전쟁 중에 東宮(동궁)을 설치하여 못을 파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키워 국왕으로서 위세도 과시하며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한편 北原小京(북원소경)과 金官小京(금관소경)을 설치하고,
하급 관리를 늘렸으며, 국가와 지방 관리들에게 도장을 나누어
주고 外司正(외사정)을 두고 등 체제 정비에 힘썼습니다.

20190126_122559[文武王碑片(문무왕비편) 상단부 앞면]

20190126_122555[文武王碑片(문무왕비편) 하단부 앞면]

이 비석은 이 비석은 正祖(정조) 20년(1796) 무렵,
당시 慶州府尹(경주부윤) 洪良浩(홍양호)가 발견하였다 한다.

비문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磨耗(마모)가 되어 全文(전문)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앞쪽은 신라에 대한 찬양,
신라 김씨의 내력, 武烈王(무열왕)의 치적, 文武王(문무왕)의 업적 및
백제 평정에 관한 것이다.

20190126_122607[綠釉四天王像塼(녹유사천왕상전) / 재현품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재현품]

20190126_122612[綠釉四天王像塼(녹유사천왕상전) / 재현품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재현품]

20190126_122624[전시된 신라 기와 유물]

20190126_122636[전시된 신라 기와 유물]

20190126_122643[여러 종류의 토용]

20190126_122643-1[文官士備(문관토용) / 통일신라 / 경주 용강동]

20190126_122645-2[武士士備(무사토용) / 통일신라 / 경주 용강동]

20190126_122643-3[女人士備(여인토용) / 통일신라 / 경주 용강동]

20190126_122653[전시된 유물]

20190126_122710[禮賓圖(예빈도) / 중국 서안시 건릉 내 장화태자묘]

장회태자 李賢(이현, 654~684)은 당나라 高宗(고종, 재위 619~705)의
여섯째 아들이다. 측천무후의 지원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정쟁에 휘말려
680년 폐위되었다.
후대에 황태자로 복원되면서 고종 황제의 건릉 내에 배장되었다.

무덤의 벽화 중 이현이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모습의 예빈도가 잘 알려져 있다.
이 벽화에서 조우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신라 사신으로 추정된다.
[신라사신 , 오른쪽에서 두번째]

이 전시로 진품과 유사한 크기로 출력한 사진입니다.

20190126_122722[獅子像(사자상) / 통일신라 / 경주 교동]

사자는 ‘百獸(백수)의 왕’으로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위엄을 나타낸다.
이 사자상은 원래 어디에 세워졌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발견된 곳이
교동이기 때문에 신라 궁성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
교동 근처의 춘양교터, 월정교터에서도 사자상이 발견되었다.

장방형의 받침 위에 앉아 있는 형태이며,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전체적으로 경직된 모습을 하고 있다.

20190126_122726[모서리기둥(隅柱石) / 9~10세기 / 경주 구정동]

경주시 구정동 대덕산 남쪽 구릉 말단에서 9~10세기에 만들어진
신라 돌방무덤이 하나 있다. 이 무덤은 독특하게 네모난 형태(方形墳)를
하고 있는데, 무덤의 주인공은 봉분을 따라 둘린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등에서 볼 때 왕으로 추정된다.

네모난 봉분의 각 모서리에는 사각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서역의 武人像(무인상)과 獅子像(사자상)이 각각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무인은 눈을 부릅뜬채 양 손으로 무기를 치켜들고, 사자는
힘차게 땅을 딛고 포효하면서 왕의 무덤을 지키는 모습이다.

20190126_122738[권력은 왕릉에서 나온다.]

왕릉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건조물이기도 합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왕은 선왕의 장례 의식과 왕릉 축조를 주관하면서
왕권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신라 왕릉은 6세기에 등장한 돌방무덤을 기본 구조로 하였으며,
왕릉 둘레에 석조물들이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봉토가 흘러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護石(호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호석에는 각 방위를 수호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지며, 왕릉의 앞쪽과 둘레에는 문무석인상, 석사자상, 석주 등이
추가됩니다. 때로는 능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신라의 독특한 능묘 제도를 만들어 갔습니다.
성덕왕릉(재위 702~737)은 석조물이 최초로 완성된 사례입니다.

20190126_122750[神將像門扉石(신장상 문비석) / 복제품]

20190126_122750-1[將像門扉石(신장상 문비석) / 통일신라 / 경주 서악동]

경주 서악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돌문이다.
문에는 천정과 바닥을 결합될 수 있도록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다.
앞. 뒷면에는 신장상이 돋을새김이 되어 있다.

머리 뒤에 두광이 있고, 하체에만 군의를 입고 있다.
손에는 긴 금강저를 들고 있고, 손목. 발목에는 장식이 있으며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신장이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20190126_122750-2[神將像門扉石(신장상 문비석) / 복제품]

왼쪽 문비석에는 앞뒷면 모두 신장상 조각이 있습니다.
본 복제품은 왼쪽 문비석 뒷면의 모습입니다.
선명한 문양을 볼 수 있도록 탁본 처리하였습니다.

20190126_122806[전시실 내부 전시된 유물]

20190126_122821[金剛力士像(금강역사상) 얼굴 / 통일신라 / 8세기]

金剛力士(금강역사)는 仁王(인왕) 또는 二王(이왕)으로 불리우며,
보통 입을 벌린 상과 입을 다문 상이 쌍을 이루어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한다.

이 금강역사상 얼굴조각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석굴암 제1차 수리 때
굴 내부에 쌓여 있는 흙 속에서 왼쪽 팔뚝과 왼손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머리카락은 정수리로 바싹 치켜 올려 상투머리로 묶었으며,
부릅뜬 두 눈과 치켜 올라간 눈썹, 튀어나온 광대뼈 등,
분노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20190126_122811[전시된 토기류 유물]

20190126_122827[전시된 유물]

20190126_122841[전시된 유물]

20190126_122855[전시된 유물]

20190126_122848[전시실 내부 전경]

20190126_122906[성덕여왕을 기리며 신종을 만들다.]

성덕왕은 702년 즉위하여 737년 사망할 때까지 36년간 통치하였습니다.
재위 중에 민생을 안정시키고 요충지에 성을 쌓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소원해진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遣唐使(견당사)를 보내어 많은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이때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통일신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입니다.

이러한 성덕대왕을 찬양하기 위하여 효성왕(재위 737~742),
경덕왕(재위 742~765), 헤공왕(재위 765~780)대에 걸쳐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습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높이 3.3m, 입지름 2.2m에 달하며, 구리 12만근이 쓰였다고
하는데 현재 무게는 18.9톤입니다. 원래 봉덕사에 달려 있었으나 절이 없어지면서
영묘사를 거쳐 봉황대로 옮겨졌다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신종에는 1천자 가량의 문장을 새겼는데, 신종의 소리로써 부처님의 공덕과
더불어 성덕대왕 치적을 영원히 널리 알려 나라를 평안 하게 하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20190126_122900a[경주 남산의 유물 분포도]

20190126_122938[고운 최치원을 추억하다.]

20190126_122942-1-vert[고운 최치원을 추억하다 / 정극인 / 불우헌집]

20190126_122924[敬順王肖像畵(경순왕 초상화) / 복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화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금강산본,
고자암본의 세 종류가 그려졌다고 한다. 당시 원본은 확인할 수 없으나,
금강산 본을 제외한 두 종류는 승혜전에 조선시대의 이모본과 초본이
보관되어 왔다.

이 초상화는 1904년 畵僧(화승) 李瑨春(이진춘)이 해인사본을 본 떠
그린 것이다. 부분적으로 불화의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다.

20190126_122917[신라 천년 역사를 마감하다.]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출현하여 953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하였습니다.
676년에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가 되어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통치의 근본을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8세가까지는 얼마 동안 전성기가 지속되었습니다만, 후반에 이르러
정쟁이 자주 일어 났습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지고 왕실과
나라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이 무렵의 왕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정치를
개혁하는 데 실패 하였습니다. 결국, 9세기 말 고구려와 백제와 후손들이
나라를 다시 세워 후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신라 왕실은 귀족들이나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기에 이르렀고,
국력은 급속히 쇠퇴하였습니다. 결국 천년을 이어오던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역사관 1실~4실(신라의 융성과 멸망) 소개를 마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3월 8일 at 8:52 오전

    신라 천년도 지도자의 무능으로 사라졌습니다
    자꾸만 현재와 비교해 보게 되네요.
    그 길로 가는것 같아서요.

    • 초아

      2019년 3월 8일 at 8:50 오후

      저도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현실이 그쪽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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