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 1-1
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신립장군 묘소 가는 길 안내팻말과 등산로 안내도]
네비에 주소를 넣어 왔지만, 네비양이 엉뚱한 곳에서 멈추게 하였다.
좌측으로 묘소가 있다 하는데… 찾지 못하여 다시 턴하여 내려오다가
마침 근처를 지나치는 아주머니를 만나 여쭈어보았더니, 이곳에 주차해놓고
산으로 올라가도 되고, 아래로 내려가서 주차한 후 묘소로 가는 길이 있다 하신다.
[평산신씨 충장공 재실과 묘소 가는 길]
산으로 오르는 길도 보이지 않고, 숲이 우거져서 우린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동네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신립장군 묘 안내팻말이 보였다.
올라올 때 왜 지나쳐 왔을까?
아마도 네비양이 직진하라는 말을 그대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충장공 재실 전경]
어쨋거나 아래쪽 안내팻말 근처 공터에 주차를 해 놓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은 넓게 잘 딲여져 차로도 재실 안 넓은 공터에 주차를 해도 될것 같았지만,
아주 오래전 들렸을 땐 재실 앞에 주차한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ㅎ
걷기 운동 했다 치지 뭐… 하고 나 자신을 위로했지요.^^
[평산신씨 충장공종중 충장공 재실 충장재]
본관 平山(평산). 자 立之(입지). 시호 忠壯(충장).
22세 때인 선조 즉위년(1567)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都摠府都事(도총부도사). 經歷(경력)을 지내고 晉州判官(진주판관)이 되었다.
[묘소 가는 길]
1583년 穩城府使(온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여진족 尼湯介(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안내판과 노거수]
[안내판 글 내용]
[노거수]
난 이상하게도 노거수에 눈이 자주 꽂힌다.
헐벗은 나목의 노거수 몽땅 잘려나간 윗둥치 그 위로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나간 그 모습이
포기할 줄 모르는 삶의 모습을 보는듯 하여 참 좋다.
[묘소 가는 길]
1587년 興陽(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右防禦使(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三司(삼사)의 어처구니 없는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묘소 가는 나무계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三道都巡邊使(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忠州(충주) 彈琴臺(탄금대)에 背水陣(배수진)을 치고 북상해오는 적군과
대결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패배하고, 부하 장수인 金汝沕(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습니다.
죽은 후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묘소가는 길]
길이 끝나는듯 하다가 다시 시작되고 꺽어지면 또 다시 나타나는 묘소 가는 길
[묘소 가는 길]
이곳에서는 가는 길이 양갈래로 갈린다.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서리다가 조금더 오르기 좋은
오른쪽 계단을 택하여 올랐다.
묘소 오르는 길]
마지막 묘소 오르는 길
이 길이 끝나는 곳 우측으로 5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申昉(신방) 묘 전경]
申昉(신방, 1686-1736)은 신립의 6대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자 明遠(명원) 호 鈍庵(둔암) 相臣(상신) 琓(완)의 손자이며, 聖夏(성하)의 아들이다.
[申昉(신방) 묘 앞 좌우 문인석]
[申昉(신방) 묘]
숙종 45년(17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고,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로 한 쌍이 있고, 묘비는 없다.
[申昉(신방)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문집으로 ‘屯菴集(둔암집)’이 있다.
[申聖夏(신성하) 묘 전경]
위에서 소개한 申昉(신방)의 아버지 申聖夏(신성하,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 成甫(성보), 호 和庵(화암). 아버지는 영의정 玩(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趙遠期(조원기)의 딸이다.
[申聖夏(신성하) 묘비]
[申聖夏(신성하) 묘앞 좌우 문인석]
[申聖夏(신성하) 묘]
숙종 30년(1704)에 참봉이 되고, 이어 현감을 거쳐 연안부사가 되었다.
돈녕부도정에 이르러 平雲君(평운군)에 봉해졌다.
문장이 뛰어났고 72세에 돌아가셨으며, 저서로는 ‘和菴集(화암집)’이 있다.
[申聖夏(신성하)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가 지은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過恩津彌勒(과은진미륵)
彌勒童時曾識面(미륵동시증식면)
내 어릴 때 이미 부처님을 보았는데
今來默感浮生事(금래묵감부생사)
이제 와 산다는 게 뜬 구름임을 알겠네
人生悲歡四十年(인생비환사십년)
인생의 애환이 어느덧 40년이 지난 지금
[申砬將軍(신립장군) 墓(묘) 전경]
신립과 부인 全州崔氏(전주최씨)와의 합장묘로,
봉분 앞에는 床石(상석)과 香爐石(향로석)이 있으며,
무덤 앞 좌우로 童子像(동자상)과 4m 전방에 長明燈(장명등)을 세웠다
1986년 9월 7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고,
평산신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申砬將軍(신립장군) 墓(묘) 전경]
보통 자손의 묘는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그 반대로 손자들이 신립묘의 앞과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申砬將軍(신립장군) 묘비]
봉묘비는 봉분의 좌측에 위치하는데, 총 높이가 224cm로 큰 규모이며,
加檐石(가첨석). 碑身(비신). 基臺(기대)로 구성되어 있다.
가첨석은 팔작지붕형의 형태로 지붕 부분에 龍(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기대의 측면에는 唐草紋(당초문)이, 상부 모서리에는 蓮花紋(연화문)이 장식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서
숙종 29년(1703)에 세운 것이다.
[申砬將軍(신립장군) 좌우 文人石(문인석)]
[申砬將軍(신립장군) 墓(묘)]
신립장군과 넋고개에 얽힌 사연을 지나칠 수 없지요.
소개합니다.
탄금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장군을 건져냈을 때
장군의 모습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고 호령할것 같은 기세를 하고 있었다 합니다.
부하들은 시체를 건져 한양으로 오는 도중
“장군님” 하고 부르면 관속에서 “오냐”하는 대답소리가 났다 합니다.
이천시를 지나 기치미 고개에 이르러 또 “장군님”하고 부르니까
대답 대신 ‘에헴’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합니다.
넋고개에 이르러 또다시 “장군님” 하고 부르니까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신립장군의 넋이 기침을 한 고개라 하여 ‘기치미고개’라 하고
장군의 넋이 완전히 떠넌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申砬將軍(신립장군)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기치미고개는 이천 설봉산 근처 다산고등학교 근처에 있으며,
넋고개는 이천시와 광주시의 경계이며 동원대학교가 있는 근처에 있다 합니다.
장군의 시신은 기치미고개와 넋고개를 지나 현재의 이곳 근처까지 운구되었는데
운구된 장군의 관이 이곳에 이르자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아 이곳에 묘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안산이 뿌옇게 보이는것은 미세먼지 때문입니다.
[신립장군 묘쪽에서 담은 후손 묘 전경]
[앞쪽 신준의 손자 신완 묘 뒤쪽 신랍장군의 손자 신준 묘 전경]
자는 公獻(공헌), 호는 絅庵(경암). 영의정 申景禛(신경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申埈(신준)이고, 아버지는 목사 申汝拭(신여식)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李基條(이기조)의 딸이다.
[신립장군의 증손자 申琓(신완) 묘]
삼촌 申汝挺(신여정)에게 입양되었다.
朴世采(박세채)의 문인이다.
[申琓(신완) 묘비]
[申琓(신완) 묘앞 좌우 文人石(문인석)]
[申琓(신완) 묘]
현종 13년(167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이 되었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남인 權大運(권대운)
閔熙(민희) 등을 공격하였다.
1684년 江襄道(강양도 : 지금의 강원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도승지·대사헌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을 때,
태조의 시호를 덧붙이는 것에 반대한 朴泰維(박태유)의 상소에
편들었다 하여 삭탈관직되었다. 1688년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었다.
1694년 예조판서를 거쳐 1700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禧嬪張氏(희빈 장씨)의 처벌완화를 주청하였고
時務(시무) 8조를 올렸으며,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
[申琓(신완)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1703년 영의정에 오르고 平川君(평천군)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06년 유생 林簿(임부)로부터 앞서 1701년 세자에 대한
모해설이 있었을 때 推鞫(추국 : 임금의 명에 의해 국문함.)에 참여하여
사건규명을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시호는 文莊(문장)이다.
저서로 ‘絅庵集(경암집)’이 있다.
[신립장군 손자 申埈(신준) 묘 전경]
신완의 할아버지이자 신립의 손자인 신준(1572-1638)의 묘.
다른 묘와 달리 신준의 묘 앞에 장명등이 있다.
[申埈(신준) 묘비]
묘의 오른쪽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를 통해 부인 안동김씨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申埈(신준) 묘앞 좌우 文人石(문인석)]
[申埈(신준) 묘]
신준은 음사로 관직에 나가 찰방과 현감을 지냈으나,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靖社功臣(정사공신)이 되고 平興君(평흥군)에 봉해졌다.
[申埈(신준)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이후 강화 유수를 거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묘 뒤 山神祭壇(산신제단)]
평산신씨 충장공 종중 충장공 재실
申砬將軍(신립장군) 墓(묘)
그리고 후손들의 묘소 답사 소개를 마칩니다.
데레사
2019년 3월 11일 at 8:37 오전
곤지암을 자주 가도 묘소는 잘 안 찾기에 있는줄도 몰랐습니다.
경주의 신라왕릉이나 서울근교의 조선왕릉외는 묘지를 잘 찾지
않아서요.
잘 가꾸어져 있는걸 보니 후손들이 제대로 돌보나 봅니다.
초아
2019년 3월 11일 at 9:12 오후
저도 사실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풍수를 하는 남편덕에 운전수로 함께하면서..
차츰 흥미가 생겼지요.
처음엔 속으로 원망도.. 마음을 바꿨지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그 후로 차차 마음이 편해졌으며
이젠 오히려 제가 즐기는 편이랍니다.
묘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곳을 다녀오면
제 맘도 흐뭇하고 좋은데, 그렇지 못한 곳을 다녀오면
오랫동안 마음이 불편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