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 광모재, 용헌공 이원 신도비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목동 277-3

20190306_132705[고성이씨 광모재와 용헌공 이원 신도비 전경]

李原(이원, 1368~1429)
자 次山(차산), 호 容軒(용헌), 본관 固城(고성) 시호 襄憲(양헌)
고성의 옛 땅이름이 鐵城(철성)이어서 철성이씨로 부르기도 한다.

고성이씨는 시조 이래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할아버지 李岩(이암)은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에
능해 명필로 유명하였고, 아버지 밀직제학 岡(강)은 일찍 죽었으나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文敬(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0190306_132811[廣慕門(광모문) 현판]

20190306_132719[廣慕門(광모문) 전경]

용헌공 이원이 조선조에 들어 통치기반 확립에 기여하여
공신의 반열에 오르니 삼대에 걸쳐 번성을 이어가면서
有力鉅族(유력거족)의 가문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 유학의 거봉인 양촌 권근이 매부이며,
세조대의 공신 권람이 사위가 되고 시. 서. 화의
三絶(삼절)로 알려진 강희안이 손주사위이며 정현왕후의
아버지인 윤호가 외손자다.

배위는 양천허씨로 1남 2녀를 두었고
재취부인 전주최씨와 사이에 6남 4녀를 두었다.

20190306_132802[고성이씨 광모재 안내판]

20190306_132802a[고성이씨 광모재 안내 글 내용]

그는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매부인 陽村(양촌)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포은 정몽주가 그 모습을 보고 일찍
죽은 그의 아버지 강을 떠올린 듯 하늘이 무심치 않았다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 4대 왕에 걸쳐 國基(국기)를 다지는데 기여하면서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정국운영 과정에서 파생한 곡절에
부딪쳐 신진세력들로부터 탄핵을 받는 등 어려움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을 맞기도 했다.

20190306_132707[神道碑閣(신도비각) 전경]

20190306_132755[신도비각 안내 글 내용]

20190306_132744[神道碑(신도비)]

신도비는 명종 15년(1560) 선생의 사후 131년 되는
해에 세워졌고, 현재는 고성 이씨 재실인 광모재 입구
비각 내에 남향하고 있습니다.

비문은 예문관 대제학 서거정이 짓고,
고손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명규가 쓰고,
고손 예문관직제학 이 택이 전서하였습니다.

 

 

20190306_132847[좌측에서 담은 神道碑閣(신도비각) 전경]

20190306_133206[우측 옆에서 담은 신도비]

20190306_132911[담너머로 담은 광모재 전경]

20190306_133117[담너머로 담은 광모재]

20190306_132926[광모재 우측 뒤쪽 신도비 전경]

20190306_132949[고성이씨 신도비 전경]

20190306_132957[이원선생 장자 가선대부 둔재 李臺(이대) 신도비]

세종 5년(1423) 同副代言(동부대언)과 右副代言(우부대언)을 거쳐
僉知中樞院事(첨지중추원사), 中樞院副使(중추원부사)를 지냈다.

20190306_133003[이원선생 막내 李墀(이지) 신도비]

李墀(이지, 1420~1486) 문과급제자

20190306_133008[이원선생 손자 이지의 장남 이륙 신도비]

李陸(이륙) 4회의 과거 급제를 하면서도 관직에 종사하여
꾸준히 학문에 열의가 대단하였으며 또한 천성이 명민하고
정직하였으며 군서를 많이 알아 靑坡劇談(청파극담)을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

20190306_133014[신도비가 마모가 심해 새로 만든 이륙 신도비]

20190306_133020[??]

다섯번째는 신도비가 귀부인 거북이 머리가
거꾸로 비문을 보고 있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 분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20190306_133048[뒤쪽 후손의 신도비쪽에서 담은 광모재 담너머 신도비와 광모문 전경]

세종대에 이원은 부당한 관료선발과 노 비 불법취득 등으로
欺君逆命(기군역명)이란 덫에 걸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여산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감하였다.

훗날, 太宗卯庭(태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不遷之位(불천지위)로 예우를 받고 공신녹권과
모든 직첩을 돌려받았다.

재실 건너편 산에 묘소가 있다 해서 들렸지만,
입구까지는 찾았는데, 묘소로 오르는 길은 보이지도 않고,
돌아갈 시간도 촉박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습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3월 14일 at 10:59 오전

    멀리까지 오셨네요.
    나는 가까워도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ㅎ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이 부니까 미세먼지가 없어서 나들이에
    좋을것 같은데도 선듯 나서지지가 않네요.

    • 초아

      2019년 3월 14일 at 9:07 오후

      남편이 가자해서 저도 나셨습니다만,
      아마도 저 혼자라면 멀리 그곳까지는 염두도
      못내었겠지요.
      좀 더 따뜻해지고 미세먼지가 덜한 날
      어디든 나서보셔요.
      힘내시구요. 늘 건강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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