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
北山書阮(북산서원) 입구 안내 표석]
北山書阮(북산서원) 안내 표석비가 있는 우측 건너편 앝은 둔덕위에
浙江張氏(절강 장씨)의 始祖(시조) 張海濱(장해빈)의 묘소가 있다.
묘소에 들린 후 헌종 12년(1846)에 장해빈(張海濱, 1547∼1657)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北山書阮(북산서원)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北山書阮(북산서원) 입구쪽 전경]
불게 칠한 철문은 활짝 열려 반겨주는듯 하여 기뼜지만,
서원 출입문인 삼문은 닫혀 있는듯 하였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은 접을 수 없었다.
[北山書阮(북산서원) 외삼문 전경]
[장해진선생과 정부인 의령남씨 묘비]
묘소에 있어야 할 묘비가 어찌하여 이곳에 세워져 있을까?
방금전 묘소에도 다녀왔는데, 그곳의 묘비는 새로 세운 묘비
이곳의 묘비는 舊碑(구비)인가?
[서원 외삼문]
살짝 열린듯 보이는 삼문이 반갑다.
[끈으로 묶어놓은 대문]
그러나 닫혀 있어서 급실망.
자세히 보니 끈으로 묶어 놓아 풀고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기에
묶인 끈을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앞 두덩이의 돌은 무엇?
수문장? 아무튼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음이 반가웠다.
[北山書阮(북산서원) 현판]
[외삼문에서 정면으로 담은 北山書阮(북산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팔작지붕에 민도리형식이며,
좌우로 한 칸씩 협실을 두고, 정면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북산서원과 신도비 전경]
1684년 창건하였으며 건물은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위에 정착하여 세거해 온 절강 장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장해빈은 중국 抗州(항주) 鳥江懸(조강현)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장수로 와서 귀화한 뒤 군위에 정착, 世居(세거)하였다.
[정면에서 담은 장선생 神道碑(신도비)]
[신도비 옆면]
장해빈은 절강장씨의 시조이자, 군위 입향조이다.
명나라 항주도 금화부 烏江縣(오강현)에서 태어나 23세 때
정유재란에 조선지원군 장수로 참전한 뒤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군위에 남아 정착하였다.
조정에서 혜민서 참봉과 율봉도 찰방을 제수했으나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서재]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59년 사람의 중의로 북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북산서원을 강당과 2개의 사당이 병렬로 위치하고 있으며,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景華祠(경화사)와
조그만 사당, 강당, 외삼문, 서재 등 총 5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군위에 정착하여 세거해 온 절강 장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신도비쪽에서 담은 사당 협분]
서원 강당 뒤쪽 높은 지대에 사당의 문은 닫혀
있는듯 하였으나 혹시나 하는 맘으로 돌계단을 올라갔다.
[돌계단과 사당 협문]
돌계단을 올라가보았지만, 사당의 문은 자물통으로 잠그어 놓아서 통과
비탈진 담벼락 너머로 담으려 해 보았지만, 담지 못하고 괜히 애만 쓰다 돌아섰다.
[회화나무 전경]
절강장씨 시조이자 군위 입향조 장해빈이 심은 회화나무라 합니다.
[회화나무]
[회화나무]
[내삼문]
사당 내삼문은 자물통으로 그냥 걸어두었기에 살짝 들어가 보았다.
[景華祠(경화사) 현판]
[좌측에서 담은 景華祠(경화사) 전경]
재북마을 중앙에는 장해빈을 모신 북산서원이 있고
그 뒷산에는 대명단이 있다 합니다만, 돌아와서 자료를 찾다가
알게되었기에…대명단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대명단이 있다는것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아는만큼 보인다나 하는가봅니다.
[우측에서 담은 景華祠(경화사) 전경]
증 병조참판공 장해빈의 위패를 모신 景華祠((경화사)
[경화사 담너머로 담은 사당]
높은 계단을 올랐지만, 닫혀 있는 문.
담너머로 담을까 하였지만, 그것도 용납하기 않아서 돌아섰는데,
경화사 담 너머로 환히 내려다보여셔 찰칵 담아 보았습니다.
이곳은 제사에 쓸 제수를 보관해 두는 곳이라 합니다.
[좌측 옆에서 담은 북산서원 강당]
귀화는 하였지만, 고국이 그리운 장해빈은 뒷산에 대명단을
만들고 매번(아마도 매월 삭망에)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망궐례를 올렸을 것이라 하네요.
두사충이 대구에 대명단을 세운곳이 대구의 대명동이고
서학이 성주에 세운 대명단은 장해빈이 세운 대명단과 함께 현존하고 있다 합니다.
[서원강당쪽에서 담은 삼문 전경]
시조이자 입향조를 제향하기 위해 절강장씨들의 집성촌에
건립한 조선 후기 문중서원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동시에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정착한 귀화인을 제향한 조선시대 흔치 않은 서원의 하나이다.
데레사
2019년 4월 1일 at 8:55 오전
서원은 가보면 거의가 비슷비슷해서 사실
특징을 찾아보기가 어렵더라구요.
초아님은 잘 구별해 내는군요.
탱큐.
초아
2019년 4월 1일 at 8:48 오후
저도 잘 몰라요.
다녀와서 인터넷 검색 덕을 보는거랍니다.
검색을 통해 알아가며, 배우며 익혀가는거지요.
늘 좋게만 봐주시는 언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