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 37
강원도 기념물 제75호
[彰義祠(창의사) 節義門(절의문) 전경]
[안내판 글 내용]
[節義門(절의문) 현판]
[節義門(절의문)]
아주 오래전 이곳을 들렸을 때도 절의문은 닫혀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굳게 닫혀 있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담이 낮아서
담 너머로 안쪽을 담을 수 있다는게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좌측 담 너머로 담은 彰義祠(창의사) 전경]
창의사는 원천석 선생의 影幀(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다.
[우측 담 너머로 담은 彰義祠(창의사) 전경]
2006년 8월 31일 강원도와 원주시에서 공동으로
건립하였으며, 매년 양력 4월 23일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괭이눈]
아쉬운대로 담너머로 창의사를 담고 돌아서려는데,
아래쪽에 아주 작은 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괭이눈이었네요.
봄이 왔다고 괭이눈 노란꽃도 수줍게 폈네요.
당연 담아왔지요. 이웃님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괭이눈]
씨앗모양이 고양이 눈을 닮았다 하여
괭이눈이라 불리는 이 꽃에는 종류도 많다.
산괭이눈, 애기괭이눈, 선괭이눈, 가지괭이눈, 금괭이눈,
푸른괭이눈, 큰괭이눈(Type1), 큰괭이눈(Type2) 등으로 나누어 지기도 한다.
담아 온 이 꽃은 어디에 속하는지는 몰라도 괭이눈인건 분명합니다.
꽃말 : 순간의 아름다움, 변심
[사당앞쪽 우측 옆 묘역 가는 길]
[묘역 아래 안내판 전경]
[안내판 글 내용]
[안내판 영문 글 내용]
[아랫쪽에서 담은 묘역 전경]
그동안 숫한 묘소를 다녀왔지만, 운곡 선생님처럼 소박하고
아담한 선생의 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그때보다는 묘역이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서 오르는 길 둔덕아랫쪽에
풀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오르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습니다.
[묘역 우측 아래쪽 묘갈 전경]
봄날이라 산벚꽃도 활짝폈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에 있는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의 묘로서 강원도기념물 제75호이다.
[운곡 원천석 묘역 전경]
본관 原州(원주), 자 子正(자정), 호 耘谷(운곡).
고려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悅(열)의 손자이며,
宗簿寺令(종부시령)을 지낸 尹迪(윤적)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풍수를 좋아하는 옆지기 따라 여러곳을 다녀보았지만,
墓地(묘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얕으막한 언덕 위에
소박한 봉분이 작으만하게 봉긋 솟아있었다.
너무 커서 부담스럽지도 않았으며, 상석과 비석등으로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지만, 무지한 나의 눈으로도 아! 이게 바로 명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곡 원천석 묘]
고려 말 점차 쇠락하는 정치 현실을 슬퍼하며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의 삶을 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켰던 운곡 원천석 선생.
운곡 선생이 잠든 이곳 묘터는 무학대사가 묘터를 잡아주었다 합니다.
[운곡 원천석 묘]
무학대사가 원천석 선생 생존 당시
“윗 지점은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요, 아래 지점은 백대 자손이 번영할 곳이다.”
고 하였다 합니다.
선생은 부귀영화를 택하지 않고 후손을
위하여 봉요혈 형국에 묘소를 정했다 합니다.
봉요혈은 벌의 허리라는 뜻이라 하네요.
[묘비]
묘비에는
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라 새겨져 있다.
[묘 뒤에서 담은 앞 전경]
선생은 충숙왕 17년(1330) 開城(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춘천향교에서 공부하였는데 학문이 뛰어났다.
27세에 國子監(국자감) 進士試(국자감)에 합격하였으나 고려말의
정치적 어지러움을 보고 雉岳山(치악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고,
李穡(이색) 鄭道傳(정도전) 등과 交遊(교유)하면서 時局(시국)을 개탄하였다.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만년에는 儒學者(유학자)이면서도 佛敎(불교)와 道敎(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三敎一致論(삼교일치론)’ 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李芳遠(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었는데,
이방원이 조선왕조 3대왕으로 즉위하여 세 번이나 치악산으로
찾아가 스승을 뵙고자하였으나 몸을 숨기고 만나주지 않았다.
치악산 속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30여 년 동안 절의를 지키며 초근목피로 생활하였다.
[묘 뒤에서 담은 앞 전경]
태종은 3일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운곡 선생이 계신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갔다 하여 후세사람들은 태종이 절을 한 산을 배향산이라 하고,
태종이 원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넘었던 산 고개를 원통재라고 불렀다.
태종이 3일간 머물렀던 곳을 주필대, 또는 太宗臺(태종대)라 하기도하며,
특히, 태종대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면서
운곡 선생의 절의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묘 뒤쪽 山神石(산신석)]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
원형을 현감으로 등용하여 다소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묘 아래쪽 묘갈 전경]
조선 건국 초기에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다.
운곡은 생전에 시 1,144수를 남겼는데 ‘懷古歌(회고가)’ 중, 일부이다.
[산신석 쪽에서 담은 묘갈과 묘역 전경]
懷古歌(회고가)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五百年(오백 년) 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쳤으니
夕陽(석양)에 지나는 客(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묘갈 앞면]
선생의 遺言(유언)에 따라 본래 表石(표석)을 세우지 않았으나,
4代(대)가 지나서 비로소 墓表(묘표)를 세웠다고 한다.
일설에는 새 왕조에서 준 직함을 넣어서 건립하였더니
항상 비석에서 땀이 흐르기에 그 후에 직함을 빼고 나니
땀이 흐르지 않았다 합니다.
[묘갈 앞면 새겨진 글]
墓碣(묘갈)은 조선 顯宗(현종) 11년(1670) 3월에 건립되었다.
許穆(허목)이 글을 짓고 篆書(전서)를 썼으며, 李命殷(이명은)이 글씨를 썼다.
[묘갈 뒤면]
허목은 碑文(비문)에서 선생의 易姓革命(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사상을 주나라 시대의 佰夷(백이). 叔齊(숙제)가 절개를 지킨 고사에 비교하였다.
[묘갈 뒤면 새겨진 글]
[뒤쪽에서 담은 운곡 선생 부인 묘 전경]
선생의 묘 앞쪽 솔숲이 우거진 앞쪽에는 부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운곡 선생 부인 묘]
묘비에는
耘谷 元天錫公(운곡 원천석공) 配 原城元氏之墓(배 원성원씨지묘)라 새겨져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선생의 묘처럼 평범한 묘소였는데,
재 정비하여 고쳐놓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옛 묘를 그대로 두었드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부인묘 쪽에서 담은 운곡 선생 묘역 전경]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선생의 묘 뒤쪽과
앞쪽에 자라고 있어서 선생의 곧은 충정을 보는듯하였다.
[묘 앞쪽에서 담은 내려가는 길]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갔더니, 오잉!~ 왠 횅재
창의사 절의문 삼문 중 우측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분명 조금전까지도 닫혀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안을 들어다보니
관리하시는 분이신지 무언가 작업을 하고 계셨다.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
“예, 찍어가셔요.” 하셨다.
며칠 후에 있을 행사 준비를 하시는 중이시라 하셨다.
[彰義祠(창의사) 현판]
[彰義祠(창의사)]
옳다구나 하고 사진을 맘껏 담아야지 하였지만,
담너머로 우측 좌측 챙겨 담았기에 정면 사진만 한장 담고
앞쪽 열린 절의문 전경만 담고는 감사하다는 말씀과 수고를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창의사쪽에서 에서 담은 앞쪽 節義門(절의문) 전경]
선생은 위대한 스승으로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懷古歌(회고가)’와 ‘耘谷時史(운곡시사)’가 전해진다.
[창의사 안내판과 묘역 가는 길 구름다리]
운곡 선생 묘역과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소개를 마칩니다.
내일은 이곳에서 조금 윗쪽으로 오르면 모운재와 운곡 선생의 시비와
원주 원씨 시조단 소개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