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402-3
[충렬사와 운곡 원천석 묘역 가는 갈림길 전경]
운곡 선생의 묘역에 들리려면 이곳을 통과해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하며, 우측으로 원주 충렬사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습니다.
[우측 충렬사 오르는 입구 전경]
忠烈(충렬)은 ‘충성스러운 열사’라는 뜻이며,
따라서 충렬사에 봉안된 사람들은 대부분 외적의 침입 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서 나라를 구한 인물들을 모신 곳이기도 하다.
‘忠烈祠(충렬사)’는 사당 현판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현판 중 하나이다.
[관리사무소와 화장실]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있는 사당은 거의 일률적으로
‘大成殿(대성전)’이란 현판이 붙지만, 홀로 세워진 사당은
다양한 현판 이름이 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이 ‘忠烈祠(충렬사)’라 합니다.
‘忠烈祠(충렬사)’라는 사당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지역에는 다 있다.
[안내판 전경]
[충렬사 안내판 글 내용]
[원주 충렬사 안내도]
[충열사 영어, 중국어, 일어 안내글 내용]
[下馬碑(하마비)]
이 곳 忠烈祠(충렬사)는 護國精神(호국정신)의 표상인
고려의 元沖甲(원충갑). 조선의 金悌甲(김제갑). 元昊(원호) 세분의
位牌(위패)를 봉안한 祠堂(사당)입니다.
[원주 충렬사 홍살문과 충렬사 외삼문 전경]
[충렬사 중건비 글 내용]
[홍살문 옆쪽 백목련과 벚꽃]
[忠烈門(충렬문) 현판]
[외삼문 忠烈門(충렬문) 전경]
[충렬문우측 앞 신도비와 신도비 유래 비 전경]
[上將軍諡忠肅公神道碑 銘(상장군시충숙공신도비 명)]
[신도비 건립 유래]
[외삼문 忠烈門(충렬문)]
오래전 들렸을 때는 출렬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이번 길에는 왠일인지 삼문 중 우측으로 난 문이 열려 있었다.
얼마전 소개해드린 운곡 선생 사당도 행사준비로 열어 두었는데,
아마 이곳도 행사준비로 주변을 깨끗히 청소하기 위해 열어 둔 것 같다.
우선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관리하시는 분이 계셨다.
“사진 좀 찍어도 됩니까?”
흔쾌히 찍어도 된다면서 허락을 해 주셨다.
[좌측 김제갑 원주목사 충렬비 / 우측 충효열각 전경]
[金文肅公忠烈碑閣(김문숙공충렬비각) 현판]
[김제갑 원주목사 충렬비 / 원주시향토유적 제2012-1호]
[안내판 글 내용]
[김제갑 원주목사 충렬비]
[김재갑 원주목사 충렬비문 해석 안내판 전경]
글이 작아서 읽기가 어려울것 같아서 적어 올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원체 방대한 자료라 적어 올리기도 무리일것 같아서 안내판의 글 내용을
1~3으로 나누어서 아래에 올렸습니다. 읽어보셔요.
[김재갑 원주목사 충렬비 해석 안내판 글 내용 1]
[김재갑 원주목사 충렬비 해석 안내판 글 내용 2]
[김재갑 원주목사 충렬비 해석 안내판 글 내용 3]
[忠孝烈閣(충효열각) 현판]
[忠孝烈閣(충효열각) 전경]
[忠臣(충신) 文肅公金悌甲之門(문숙공 김제갑 지문)]
[孝子(효자) 金時伯之門(김시백 지문)]
[烈女(열녀) 金悌甲妻全州李氏之門(김제갑 처 전주이씨 지문)]
[충효열각 안내 글 내용]
[忠壯齋(충장재) 현판]
[忠壯齋(충장재) 전경]
[忠肅門(충숙문) 현판]
[내삼문 忠肅門(충숙문) 전경
[忠烈祠(충렬사) 현판]
[忠烈祠(충렬사) 전경]
[충렬사 내부 모셔놓은 위패]
아무리 마음대로 사진을 담아도 된다 하셨지만,
무언가 모를 엄숙함이 느껴져서 충렬사 내부로 들어가기가 망서려진다.
열린 작은 문 밖에서 내부를 딱 한장 담고는
마음으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섰습니다.
[충렬사 쪽에서 담은 내삼문 충숙문 전경]
원충갑은 고려 충렬왕 때의 鄕貢進士(향공진사)라는 평범한 선비였다.
그런 그는 원나라의 반란군 哈丹賊(합단적)이 고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치악산의 영원산성을 포위했을 때 적에 맞서 십전십승의 전과를 올렸다.
그로 인해 원충갑은 공신에 책록되고 벼슬이 三司右尹(삼사우윤)에 이르렀다.
그의 사후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홍살문 쪽에서 담은 앞 전경]
原州牧使(원주목사)였던 김제갑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원주로 접근해오자 4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또 강원도 助防將(조방장)이던 원호는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여주 방면으로 북상해온 일본군이 남한강 유역으로
다가오자 鄕兵(향병)을 모집해 여주 인근의 신륵사와 구미포 일대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키며 도하를 저지했다.
그러나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의 격문을 받고
강원도로 이동하던 원호는 김화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들은 조선 현종 때, 충렬사를 세워 배향되었으나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도 훼철되었기에 배향이 중단되었다.
근래 충렬사가 복원됨으로써 다시 이들에 대한 배향이 이루어지고 있다.
(옮겨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