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隱堂(은은당) 조린. 拙翁(졸옹) 조성립 묘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20190419_122502[도로쪽에서 담은 은은당 조린 묘역 전경]

20190419_122154[묘 입구쪽 은은당 조린 神道碑(신도비) 전경]

전쟁의 참상은 신도비도 피해갈 수 없었나보다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비에는 행 용양위 부호군이라 쓰여있다.

묘 입구쪽에 세워진 신도비(묘갈)은 1629년 7월에 세워진 것으로
鄭經世(정경세)가 비문의 글을 지었고, 李弘胄(이홍주)와 金尙容(김상용)이
각각 비문의 글씨와 篆書(전서)를 썼다 합니다.

20190419_122228[神道碑(신도비) 螭首(이수) 앞면]

20190419_122211a[神道碑(신도비) 螭首(이수) 옆면]

20190419_122253[神道碑(신도비) 螭首(이수) 뒤면]

20190419_122240[神道碑(신도비) 龜趺(귀부)]

碑(비)는 다양한 기능과 성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재료로 세워졌다.
石碑(석비)는 처음에는 돌로 비신만 세우는 단조로운 형태에서 기술의
발전과 미적 감각의 진보에 따라 추가로 받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긴 비신을 올리고, 비신 상부도 장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신의 받침대에는 龜趺(귀부)가
마련되고, 비신 상부에는 螭首(이수)가 조각되었다.

20190419_122211[神道碑(신도비)] 옆 전경]

20190419_122302[神道碑(신도비) 뒤 전경]

20190419_122402[신도비 뒤 묘역 전경]

앞쪽 묘소가 拙翁(졸옹) 조성립 묘이고,
뒷쪽이 아버지 隱隱堂(은은당) 조린 묘소이다.

20190419_122446[拙翁(졸옹) 趙誠立(조성립) 묘 전경]

본관 橫城(횡성). 자 汝明(여명), 호 拙翁(졸옹).
평양부서윤 趙俊(조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용감부정 趙應世(조응세)이고,
아버지는 장악원첨정 趙?(조린)이며, 어머니는 金世輝(김세휘)의 딸이다.

20190419_123114[拙翁(졸옹) 趙誠立(조성립) 묘]

선조 32년(1599)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 예조좌랑.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선조 37년(1609)에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구황어사로 제수되어
현지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方物(방물)의 경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이어 國屯馬(국둔마)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했다.

왕이 윤허하여 點馬(점마)의 담당은 명망이 있는 文臣(문신)으로
가려서 보내되 겸하여 민폐와 수령이 잘하는 지의 여부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20190419_122537[墓碑(묘비)]

묘비에는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司諫院 大司諫 知製 敎趙公誠立之墓
(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사간원 대사간 지제 교조공성립지묘)라 새겨져 있다.

20190419_122446b[묘앞 우측 망주석]

20190419_122446a[묘앞 좌측 망주석]

20190419_122623[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 초야에 물러가 살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지조를 더욱 굳게 가졌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淸苦(청고)하였다고 하며,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합니다.

그가 지은 ‘客舍東軒記(객사동헌기)’는 유명한 문장으로 전해진다.

20190419_122549[졸옹 조성립 묘에서 담은 아버지 조린 묘 전경]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도 있듯이
아버지 역시 역사의 한 획을 긋고 가신 분이셨다 합니다.

20190419_123050a[隱隱堂(은은당) 趙?(조린) 墓(묘) 전경]

은은당 조린(1542~1627). 조선 중. 후기의 문신.
본관 橫城(횡성). 자 仲謙(중겸), 호 隱隱堂(은은당).
司果(사과) 趙哲守(조철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양부서윤 趙俊(조준).
아버지는 제용감부정 趙應世(조응세)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盧公佐(노공좌)의 딸이다.

20190419_122558aa[묘 주변에 핀 할미꽃]

20190419_122650[隱隱堂(은은당) 趙?(조린) 墓(묘)]

墓域(묘역)에는 묘비와 무인석 2기, 망주석 2기, 상석이 있다.
동자승도 묘 앞쪽에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고 한다.

선조 1년(156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7년 사포서별제를
거쳐 의금부도사. 전생서주부. 사헌부감찰. 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광해군 6년(1614) 간신들의 전횡이 심하고 폐모론이 일어나
李元翼(이원익). 洪茂績(홍무적) 등이 쫓겨나 귀양가게 되자 蟾江(섬강)에 은퇴하였다.

20190419_122711[墓碑(묘비)]

묘비에는
碑文(비문)에 기록되어진 造成時期(조성시기)는 인조 5년(1627, 天開) 9월로
折衝將軍行龍馬襄衛副護軍(절충장군행룡마양위부호군)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190419_122723a[우측 문인석]

20190419_122727a[좌측 문인석]

20190419_122723aa[우측 망주석]

20190419_122727aa[좌측 망주석]

20190419_122834[은은당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서울을 떠날 때 배에다 서책과 기르던 학을
싣고 가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처럼 여겼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뒤 평시서영에 등용되고 이어
장악원첨정이 되었는데, 이 때 나이 80이 넘었으므로
通政階(통정계)에 올랐다.

문집으로는 隱隱堂文集(은은당 문집)이 있다.

20190419_122843[진달래]

이르게 핀 산꽃 진달래는 다 지고 딱 한송이 남았기에 담아왔습니다.

anigif[묘 주변 산벚꽃 / 애니메이션 편집]

묘 주변 자유롭게 핀 산벚꽃도 담아와서 소개합니다.

20190419_123000[조성립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金孝元(김효원). 李敬中(이경중)과 한 동리에 살며 깊이 사귀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평하기를, 김효원은 白玉無塵(백옥무진, 흰 옥에 티끌하나 없음),
이경중은 雪月交輝(설월교휘, 달빛에 비친 눈처럼 빛남),
조린은 春風解氷(춘풍해빙, 봄바람이 얼음을 녹임)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하였다.

20190419_122407[조성립 묘 앞에서 담은 아랫쪽 신도비와 안산 전경]

은은당 조린과 그 아들 졸옹 조성립 묘 소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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