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
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출입구 와 안내판 전경]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안내판 글 내용]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안내판 영문 글 내용]
[愛憂堂(애우당) 현판]
愛憂堂(애우당) 현판은 後學(후학) 李炳玹(이병현)의 글씨라 합니다.
[입구쪽에서 담은 애우당 옆 전경]
謫廬(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우측에서 담은 애우당 전경]
愛憂堂(애우당)은 정암조광조 선생이 사약을
받은 자리라고 전해지며 그 자리에 건물을 세웠다 합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에 가운데 마루를 둔 구조이다.
[愛憂堂(애우당) 내부]
愛憂堂(애우당)이란 정암 조광조의 절명시에서 따온 이름이라하며,
내부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이 유배 중에 썼다는 시와 절명시등이 걸려 있다.
[絶命詩(절명시) 편액]
絶命詩(절명시)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를 걱정 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했도다.
白日臨下土(백일림하토)
맑고 밝은 해 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조광조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는 얇은 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 길 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러고 나서 정암은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사약을 받았다 합니다.
[逆謨誣告供述(역모무고공술) 편액]
이 세상에 선비로 태어나 믿을 사람은 임금 뿐이요
올바른 정치를 하고 기강에 병통이 되는 근원을 제거하여
새롭게 무궁한 맥을 찾고자 하는 일입니다.
여타에 다른 생각이 없음을 머리 숙여 말씀 올립니다 라는
위 편액의 글 해설 글이다.
조광조 최후의 진술을 적은것이라 합니다.
[愛憂堂記(애우당기) 편액]
[綾城謫中詩(능성적중시) 편액]
시문해설
누가 활맞은 새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된 원숭이나 학이 돌아가라 재갈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안에 들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알리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 협문]
적려 유허비는 조선 시대 능주목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길가에 있는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에
방풍판을 달았으며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로, 조광조 적려 유허비는 비각을 건립하여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합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각 전경]
[비를 보호하는 건물 안내 글 내용]
[정면에서 담은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각]
비를 제작한 시기는 현종 8년(1667) 4월로,
당시 능주목사를 지내던 閔汝老(민여로)가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정암 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뒷면]
뒷면에는 윗부분에 전서체로
靜菴趙先生追慕碑(정암조선생추모비)라 가로로 쓰고,
아래에는 ‘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記(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기)와
내용을 내려쓰기로 붉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번역문 글 내용]
유허비의 내용을 번역해둔 해설 안내문이 있어 이해 하기가 쉽다.
[우측 옆에서 담은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각 쪽에서 담은 影幀閣(영정각) 전경]
[영정각과 귀양와서 살았던 초가집]
趙光祖(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影幀閣(영정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86년 강당인 애우당과 함께 건립되었다.
[影幀閣(영정각) 현판]
[정면에서 담은 影幀閣(영정각]
[趙光祖(조광조) 선생 影幀(영정)]
영정은 조선 후기의 화가 菊塢(국오)
鄭弘來(정홍래, 1720 ~ 미상)의 작품 이라 합니다.
[ 謫中居家(적중거가)]
복원해둔 초가집의 謫中居家(적중거가)로,
靜庵(정암) 선생이 유배생활을 할 때 기거하던 처소라 합니다.
[조광조 선생이 살았던 초가집 안내 글 내용]
[적중거가 우측 방]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세 칸짜리 초가집으로
유배 당시의 누옥을 재현하여 근자에 복원하였다 합니다.
[정암과 학포 두분의 담소 장면]
기묘사화로 귀양 와 있던 정암 조광조 선생과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한 학포 양팽손 선생(갓 쓴 사람)이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라 합니다.
[좌측에서 담은 영정각 전경]
趙光祖(조광조,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孝直(효직). 호 靜庵(정암). 시호 文正(문정).
개국공신 溫(온)의 5대손이며, 감찰 元綱(원강)의 아들이다.
[영정각안쪽에서 담은 출입구 협문 전경]
魚川察訪(어천찰방)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金宏弼(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중종 5년(1510)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造紙署司 紙(조지서사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오늘날 검찰총장)이 되었다.
[영정각쪽에서 담은 유허비각 전경]
조광조는 학문과 덕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깊이 신임하면서 그를 통해
바른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그러자 조광조를 시기하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러나 조광조는 더욱 꼿꼿이 뜻을 펴 나갔으며,
반정 공신 중 공이 없는 대신들을 가려내는 둥 과감한 정치를 하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심정과 남곤 등은 드디어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와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바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다.
[애우당 안쪽에서 담은 출입구쪽 전경]
어느 날, 희빈 홍씨가 중종에게 나뭇잎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走’와 ‘肖’ 2자를 합치면 ‘趙(조)’자가 되기 때문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은 곧 ‘趙(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 벌레가 갈아먹게 한 것이다.
때맞춰 조광조가 역모를 꾸였다는 상소가 들어오니 드디어
중종은 조광조를 잡아들였다.
많은 유생과 백성들이 달려와 조광조의 무죄를
주장하고 호소하였으나 결국 조광조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정암 선생 유배지 삼문 전경]
그런데 이 이야기는 후에 조광조의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走肖爲王(주초위왕)’ 사건으로 조정에서는 훈구파 신하들을
중심으로 조광조를 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조광조와
사림파가 주요 관직들을 꿰차고 앉아 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파 신하들을 귀양보내버렸다.
이 일을 ‘己卯士禍(기묘사화)’라 한다.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은 왕도정치를
실현시키려고 했던 개혁가였지만,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당해
능성현으로 유배되었으며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
[삼문쪽에서 담은 전경]
선조 초 신원伸寃(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竹樹書院(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兩賢祠(양현사)
선조 38년(1605)에는 그의 묘소 아래 深谷書院(심곡서원)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李珥(이이)는 金宏弼(김굉필). 鄭汝昌(정여창).
李彦迪(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東方四賢(동방사현)’이라 불렀다.
저서로 ‘靜菴集(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疏(소). 策(책). 啓(계)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文正(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