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미술관..
이중섭100주년을 맞아 관람객들의 관심이 높아져
하루 평균 1500여명이 다녀간다.
더욱 가족단위 관람객이 늘어나 깊은 관심을 보인다
매주 월요일에 휴관이다
/미술관초입에 들어서면
이중섭에 관한 고은 작가를 비롯하여 쓰여진 이중섭평전과
진품 기증및 각종 행사로 발표한 자료들이 전시 되어있다
/”송00초상화”51년작..
서귀포 초가집 방 한칸을 얻어 살면서 이웃에게 화가선생님으로
불리우며, 전쟁당시 전사한 가족들이 제사드릴때 올릴 사진이 없다고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종종 부탁을 받았다
이북 고향집에서 어머니는 초상화을 그려 달라고 졸랐으나 이중섭화가는
미루기만하고 결국 그리지 못한채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렇게 인물을 그리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소,닭 새,나무등 자연에 열중했던
이중섭화가의 그림철학을 알 수 있다.
세번이상 거절하다 첫번째 전사자의 초상화가 그려졌고,그 후 세번의 부탁으로
총 넉점의 초상화가 탄생되었다. 그 중 한 유가족의 대여로 초상화 한 점이
이중섭미술관에 전시 되어있다.
/은지화…가족들은 1년을 머문 서귀포를 떠나 부산 범일동으로 이사를 간다
종군화가로 취직이 된 이중섭화가는 담배갑 속 은박지를 그림재료로
이용하면서 은지화가 탄생된다.
55년 마지막으로 미도파백화점에서 은지화를 포함하여 전시회을 열었으나,
은지화의 누드를 퇴페적이라하여 당국으로부터 강제철거을 당한 작품이기도 하다
2002년 미술관개관당시 3점의 은지화로 시작하여 3년전 일본의 부인
이남덕(마사꼬)님의 3점 기증으로 총 6점으로 늘어났다.
은지화 그림은 <가족>53년작품이다
/<자화상>55년작…
56년9월 6일에 세상을 떠난 이중섭화가의 마지막 작품,
만나지 못하는 가족의 애끓는 그리움과 피난민으로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아온 이중섭화가는 피페해진 마음과 영양실조 등으로 아픈몸은 드디어
미쳤다는 소문으로 전해지며 본인은 건재하다는 의미로 그린 자화상이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3일간 행려병사자로 방치되었다가
친우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의 유해 절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절반은 일본 이남덕부인에게 전해졌다.
<자화상>은 미술관 진품중 유일한 복사본이다
개인소장으로 알고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6.3~9.3) 에서 열린다.
2016/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