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관문을지나고kbs영화세트장을지나면은본격적인새재의부드러운흙길이 전개된다.
한자를쓰던조선시대에순수한한글로적어놓은것이특이한것같다.
한여름에는물레방아가상류조곡폭포에서내려온물로물레방아가힘차게돌아가는것이
멈추어버렸다.
내년봄이되면은물레방아가돌아가는것을볼수가있을것같다.
조곡폭포.산불됴심비에서약200여미터올라가면은40여미터높이의3단폭포가있다.
자연적인폭포가아니고인공폭포니내년봄에나폭포의물소리를들을수가있을것이다.
폭포가가동되면은아주우렁차게흐르는것이장관이다.
제2관문을들어서기전에오른쪽으로주흘산을등산하는산행로가있다.
주흘산은오르는등산로는여러군데있지만은보통이곳에서산행을시작한다.
조선조에왜군이침략하여일으킨임진왜란은조정에서왜란이끝난후에이곳문경새재에서왜군을막지못한것을매우후회하였다고한다
임진왜란과정유왜란을조선조중반에겪으면서얼마나많은서민이목숨을잃고소중한우리문화재
가왜군에게약탈당하였는가?.
조령은좌로는조령산과능곡산.백화산이있고우로는주흘산.부봉.마패봉이있어서전부천혜의산악지대인대다가좌우가절벽지대로되여있어서적은병력으로도대군을막을수가있는요충지였기때문이다.
그런데이조령이뚫리면은충주로부터한양으로통하는뱃길이라문경새재는나라의관문과같았다.
그런충주를지키려면은문경조령애서적을반드시막아야하였다.
그래서조정에서는임진왜란때에공을세운의병대장신충원을파수관으로임명해서성을쌓게하였다고한다.
그것이제2관문조곡관이다.
그뒤로문경새재의세고개에관을지었다고한다.
제3관문조령관.응암고개에제2관문.조곡관.초곡에제1관문주흘관을지은것이다.
이에신립장군은농민군8,000명을이끌고문경에내려와서제1진을제1관문에,제2진을이곳에설치하였던곳이라서이진터(二陣址)라하는곳이다.
함께조정에서내려온김여물과패전하여온이일장군이아군의수가열세임을들어천혜의요충지로지형이험한조령에서방어할것을건의하였으나,그의거친성격에다가왕년에그의철기(鐵騎)로야인을무찌르던것을과신하고듣지않았다.
신립장군은충주달천탄금대에배수진(背水陣)을쳤다가중과부적으로그만패전하고부하들과함께남한강달천강에몸을던져순절하였지만,그의고집으로인하여한양을빼앗겨선조는신의주까지몽진하여야했고죄없는수많은충주시민이죽어간것이다.
왜군초병이정탐하러와서보니조선초병이지키고있는데아뿔싸!조선초병머리위에까마귀가앉아울고가는것이아닌가.그래서피한방울흘리지않고천혜의요새를넘었다는그역사적인비극의장소가바로새재다.
새재에진을칠까,아니면탄천에배수진을칠까망설이던신립장군의꿈에소싯적장군을사모하다가원한을품고자결한처녀의원귀기나타나권하는것이었다.
이진터를지나니밤사이얼었던땅이녹아서땅이질어서등산화에흙이달라붙어서
떨어지지가않는다.이길을걸으니예전에시골고샅을걸으면은검정고무신에진흙이
달라붙어서신발이벗겨졌던것이생각이나는것은웬일일까.
이웅덩이가낙동강의발원지라고한다.아주깨끗하고맑은물이흐르고있다.
이곳에서시작한물이흐르고흘러서영남지방을구비구비흐르면서젖줄이되여서
경남김해평야를젖시면서부산앞바다로흘러갈것이다.
제3관문에드디여도착을하게된다.
제1관문에서6.5킬로인데쉬엄쉬엄오르다보니2시간가까이시간이소요된것같다.
제3관문은해발650미터로백두대간상줄기에있기때문에더욱정감을느낄수가있는것이다.
전에백두대간을종주할적에이곳에서문경으로하산을한적도있고조령산과주흘산을연계산행을
할적에도쉬어가는곳이였기때문에기억이새롭기만하다.
제3관문을쌓을적에발견했다는조령약수도아직도물이마르지않고샘이솓아오르는것을볼수가있다.
조령산쪽으로는초겨울이라산불때문에입산금지플랭카드가붙어있다.
산불감시하는분이이곳에서지키고있는것을볼수가있다.
11월은초겨울로진입하는계절이기때문에산행을금지하는듯하다.
산불방지때문에입산금지를하고있다.
백두대간의조령산과마패봉사이를넘는이고개는옛문헌에는‘초점(草岾)’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조령(鳥嶺)’이라고기록되어있다.
그어원은억새가우거진고개‘새’(억새)+‘재’(고개)에서왔다는설,‘새(鳥)’도날아서넘기힘든‘재’(고개)에서유래되었다한다.
다른설로는하늘재(麻骨嶺)와이우리재(伊火峴)사이에있다고해서‘새(사이)+재(嶺)’라고도하였다.
또다른설로는하늘재(麻骨嶺)와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보다‘새(新)’로된+‘재(고개’)라해서‘새재’라고했다는것이다.
우리가흔히경상도지방을영남(嶺南)이라고하는데그’嶺’은새재를말하는것으로‘조령(鳥嶺)의남쪽’지방이라해서생긴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