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에서 가장 큰 도시 이즈하라 에는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와 수선사.
팔번궁신사. 수선사. 고려문터. 조선 통신사비가 있어서 들려볼수가 있는
대마도 도시 라고 할수가 있다.
대마도 여행 일박 이일 여행을 하면서 제일 가슴을 아프게 하였던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딸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탐방 하면서 느낀 소감이다.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건너와서 1931년 5월에 대마도 번주소 다케유키 백작
과 결혼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을 두었으며 1955년 이혼 후 1961년 5.16 혁명 후 에
박정희 대통령 의 주선으로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 하였다.
덕혜옹주 의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 복원된 것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듯에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준명당(浚眀堂)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흘러가는 대로>에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은 여러곳은 다녀 보아도 아파트 베란다를 설치한집을 보지못하엿다.
이유는 지진을 대비해서 베란다 를 설치 하지않는다고 한다.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은 대마도의 역사적인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한국인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한반도 양식의 세형동검과 청동거울, 백제, 가야 등에서 전래된 청자와 불상, 17m 길이의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이다.
대마도 역사 자료관 으로 실내 에서는 카메라로 찰영이 금지되여 있다.
아쉽게도 실내를 들어가서 보니 사진으로 담을 자료가 많은것 같은데
아쉽기만 하였다.
대마도 역사자료관 근처에는 조선통신사 비가 우뚝 서 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으로 한·일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을 기념해 1992년 세워졌다.
대마도 이즈하라 시내는 그리큰 지역이 아니라 걸어서 다녀도 전혀무리가
가지 않는것 같다.
시내에는 면세점과 상점들이 밀집되여 있다.
대마도를 가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면세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