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한국전쟁 참전용사 알버트 할아버지!

알버트 할아버지는 혼자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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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딘 가족은 미국 보스톤에 살았다.
매년 여름 방학과 크리스마스 때면 꼭 방문을 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낸다고 했다.
그 외도 여름 방학이나 시간이 날 때 방문을 했다.
우리 가족도 벌써 여러 차례 만났다.토론토 올 때마다 우리 가게에 들리셨다.
딘과 에이바 부부는 서양 사람들인데도  부모 공경을 잘 하고
참 착하고 효성도 지극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을 때는 대신해서  알버트 할아버지를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딘은 엘리자벳이란 예쁜 딸이 있는데 알버트 할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손녀 엘리자벳을 만난 것 같다고 아주 좋아하셨다.
엘리자벳이 나와 나이가 같아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신 것 같다.
딘은 치과 의사이고 에이바는 변호사인데 에이바는  하바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기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바드 대학교를 최고의 대학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부모님 역시 그러시다.
에이바를 보니 정말 하바드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했다.
내가 너무도 높은 곳에 있는 거라 생각한 하버드 대학 교수님인 에이바는
물론이고 딘도 참으로 겸손하고 우리 아빠,엄마께 많이 감사해 했다.
우리가 할아버지를 잘 챙겨 드리는 것이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
엄마는 해 드린 것도 없고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이 은혜를 입었다면서 대답하시곤했다.
엄마는 알버트할아버지를 정말 우리 할아버지 뵙듯 요리를 하면 나보고 갖다 드리라고도 했다.
가게에 물건을 사시면 그냥 드릴 때가 더 많았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물건 사러 못온다고 하도 말씀 하셔서 엄마는 정말 우리가 사 온 가격만
받고 전달해 드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 젋은 시절 우리들에게 해 주셨던 그 사랑을 우리가 이민와서 이웃에 사시는
할아버지께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음이 너무도 감사했다.
우리 아빠,엄마는 알버트 할아버지를 친 할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잘 섬겨드렸다.
왜냐하면
친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아서 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6,25 전쟁 때 목숨을 내 걸고 위험한 곳에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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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항상 알버트 할아버지 같은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캐나다에 이렇게 와서 살 수도 없었다면서
우리들에게 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잘 들려 주셨다.
엄마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 후 세대시지만
좋아하는 책읽기를 통해서 또 외할머니께 피난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알게 되신 것을
우리들에게 잘 말씀해 주셨다.
한국전쟁 이야기는
내 또래들에겐 아주아주 먼 정말 너무도 먼 옛날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 곁에 계시는 알버트 할아버지가 겪으신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먼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싶었다.
전쟁은 말만 들어도 너무 무섭고 싫었다.
그 전쟁터에 먼 나라,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27살의 젊은 청년이 와서 싸워
주었다는 것이 내게도 너무 큰 감동이었다.
엄마를 통해서 나도 알버트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1950년,한국전쟁 때 27살의 치과의사 젊은 청년 알버트를 생각해보고 그려보았다.
그 때는 더욱 힘찬 기백과 잘 생긴 모습이었을 할아버지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인한 나라의 손실도 크고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져서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텐데 우리를 도와주러 온 UN의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게 전해 왔다.
1950년 6월 28일 UN 회원국들은 한국이 북한의 무력 침공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결의했다는 것을 엄마가 주신 한국 역사 책 속에서 읽었다.
UN군 지원 규모만 194만 1,000명 이었다고하니 정말 대단했다.
이름도 처음 들었을 동양의 너무도 작은 나라 코리아의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해 16개국에서
이젠 다 할아버지가 되신 그 당시의 젊은 오빠들이 와 주셨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뭉클한 감사로 전해졌다.
알버트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한국에 살 때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관심도 없이 지냈던
한국전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감사했다.
캐나다는 미국,영국에 이어 3번째로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했다고한다.
캐나다는 2만 5687명이 참전했고 312명이나 전쟁에서 전사했다고한다.
1212명이 또 부상을 입었다고한다.
한국에서도 미처 몰랐던 사실을 나는 알버트 알아버지 덕분에 관심을 갖고 알게 되어 감사했다.
할아버지를 통해 들으니 놀랍게도 젋은이들이 모집 광고를 보고 자신의 이름을 적어 냈다고한다.
그 때 지원자는 경쟁률도 높았다니 정말 보통 상식으로도 믿기기 어려운 사실에 나는 감동이 되었다.
어떻게 전쟁터에 서로 나가겠다고 지원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고
그래서 경쟁률이 엄청났다니 놀랍기만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
정말 바로 그 사랑이 피 끓는 청년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주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서로 한국전쟁에 가겠다고 이름을 써 낸 사람들의 경쟁률이 높았다는 말에
가슴이 찡하니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내가 비록 아직은 어리고 힘도 능력도 없지만, 앞으로
내 안의 뜨거운 사랑을 키워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고 표현하고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해 나가야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참으로 내겐 의미 있었다.
그리고 도전이 되었다.
한국 전쟁에 가면 별도의 돈 보상도 없는데 어떻게 목숨을 내놔야하는 전쟁에 스스로
자기 이름을 써 낼 수 있었을까?
나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었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당시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한다.
캐나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자유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아주 강했다고한다.
알버트 할아버지 역시 피끓는 젊은 청년으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기에
지원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정말 저절로 존경이 되었다.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내가 이렇게 캐나다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렇게 자기 목숨을 내 걸고 싸워준
수많은 분들의 선물이라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미국·영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프랑스·필리핀·터키·태국·그리스·남아프리카공화국·벨기에·룩셈부르크·
콜롬비아·에티오피아로 16개 나라가 우리들을 도왔다.
참 고마운 나라들이다.
나는 이 16개국의 이름을 하나씩 다시 되내어 보았다.
미국·영국·캐나다·네덜란드·호주·뉴질랜드·프랑스·필리핀·터키·태국·그리스·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룩셈부르크·콜롬비아·에티오피아.
정말 생각할 수록 너무도 고마운 나라다.
내가 늘 기억하고 나도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힘써 해주고 싶은 나라들이다.
이 나라 중에 특히나 에티오피아가 우리를 도왔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핀리핀도 그렇고  태국도 역시 그렇다.
때론 내가 나도 모르게 좀 얏잡아 보았던 나라들인데 너무도 부끄러웠다.
특히나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그리고 캐나다에 많이 와 있는  필리핀 출신의 많은 내니(nanny)들에게도
내가 더 친절하게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다가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매년 4월이되면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재향군인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친절하시고 신앙도 깊으시고 참으로 영과 육이 건강해서 너무도 좋다.
할아버지는 전방에 있는 노곡 초등학교 방문 이야기도 해 주셨다.
캐나다 보병 25여단의 장교와 사병들의 도움으로 설립된 학교라고 한다.
아빠,엄마도 미처 잘 모르는  노곡초등학교라는 것을 캐나다에서 캐나다 할아버지를 통해 듣는 감동은 너무도 새로왔다.
1954년 11월 3일 여단장 F.A. Clift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교한 학교가 노곡 초등학교라고한다.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노곡초등학교는 38선에서 남쪽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셨다.

한국전쟁 중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의 캐나다 보병의 본부가 있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청년에서 이제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서 그들이 지었던 학교를 다시 찾을 때의 느낌은

정말 남달랐을 것 같다.
 한국전쟁과 캐나다의 역사의 사연이 담겨진 노곡초등학교를 다음에 한국 방문하면 나도 꼭 들러보고싶다.
노곡초 아이들은 빨간 관악단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미숙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연주로 참전용사들을 맞이했다고 알버트 할아버지가 전해 주셨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노곡초등학교가 처음 지어 졌을 때는 반이 단 2개뿐이었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5개 반을 만들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2분 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2개 반을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그 때 그곳에 있었고 선생님이었다면 정말 더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헤택이 주어졌겠다싶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학교가 세워졌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감사했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캐나다대사관에서 캐나다관련 도서도 노곡초등학교에 선물했다고 하셨다.
나도 할아버지 덕분에 한국 역사도 ,캐나다 역사도 더 관심을 갖고 읽게 되어 감사했다.
청년 때의  알버트 할아버지는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5남매를 너무도 사랑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것을 보면
청년 때의 모습 또한 어떠했을지 그려진다.
캐나다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을 하셨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아이들을 모아 두고 성경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고 하신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당시 치과 의사로 캐나다 군인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고 하신다.

전쟁의 폐허 속에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어린이들의 치아 상태는 정말 말이 아니었다고한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단한 치아 치료를 짬 나는대로 해 주셨다고한다.

늘 사랑을 실천하시는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서 자란 딘 아저씨가 아버지처럼 치과의사가 된 것도 너무도 당연하다싶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또 캐나다의 마더 데레사라고 불리는 로타 히치마노바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로타 히치마노바는 캐나다에서 가장 국민적으로 인정받는 분 중 한 분이다.
나도 학교에서 수업 중에 만난 사람인데 우리나라와 관련된 훌륭한 사람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로타는  굉장한 휴머니스트였다고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 수단이 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고 한다.
몸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실천을 했다고한다.
로타의 행동이 캐나다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한다.
 캐나다인들은 그녀를 본받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에 나섰다고 한다.
로타의 진실한 마음이 캐나다인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준 것이었다.
알버트 할아버지가 전쟁통에 있는 한국 아이들을 돌보게 된 것도 로타의 영향이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도 로타처럼 행동하는 죠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다질 수 있었다.
로타는 1952년에 한국을 방문했고 1954년에 또 방문을 했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헐벗고 병들어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그 당시 군대 높은 사람에게 말해서
도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한다.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 부탁을 잘 안들어 주었는데 2년 뒤에 다시 왔을 때는
들어 주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터에 위험을 무릅쓰고 와서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로타를 생각하면
콧등이 저절로 찡해진다.그리고 내 가슴에도 뭔가 불타 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정말 나도 로타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여성으로 성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캐나다 표시가 달린 배지를 아이들에게 선물하셨다고했다.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던 노곡초등학교 아이들이 눈에 선하다는 알버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아버지가 더욱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우리 아빠보고 항상
‘의지의 한국인’이라며 칭찬을 하셨다.
아빠가 아침 7시 30분에 가게 문 여시고 밤 11시 30분까지 성실하게 가게 일 하시는 것을
대단해 하셨다.
전쟁으로 많은 집들이 부서지고 다 무너졌을 때 지을 만한 자재조차 부족했다고한다.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재만 구해주면 집을 지을 수 있다고해서 캐나다 군인들이 그 자재를 찾아 주었다고한다.
정말 그랬더니 한국 사람들이 집을  너무도 직접 잘 지었다고했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그 때의 그 기억 때문인지 항상 한국을 말할 때면
‘Energetic KOREA’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다.
폐허가 된 곳에 그렇게 집을 잘도 짓던 한국 사람들이 오늘 이렇게 잘 사는 한국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라셨다.
그러시면서 우리 아빠를 늘 대단한 한국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칭찬이 너무 듣기 좋아서 우리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삶의 터전을 잃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한국 전쟁이다.
 어떤것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던 한국이 지금의 한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음을
새삼 가까이서 느끼며 내 가슴은 감동과 감사로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렇게 성장하여 캐나다 참전용사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 가운데 알버트 할아버지도 함께시니 더욱 기뻤다.
우리가  어려웠을 당시에 자발적으로 낯선 땅에 와 함께 싸우고, 한국을 지키며, 가진 것을 나눠주었던
캐나다에 내가 와서 살고 있음이 감사했다.
이제 우리가 그리고 내가 그 은혜를 갚아 갈 때라는 결단을 단단히 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대한 민국이 있고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도와주신
알버트 할아버지를 나는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6,25 참전 용사!
생각만해도 저절로 감사가 되는  이웃사는 알버트 할아버지를 통해
나는 사랑의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생명을 걸었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나는 또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될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 감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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