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과 함께 한 나의 청소년기 감사!

2005년 10월 16일 주일 저녁에

부흥성회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는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 주신

대구 부광교회서 오신 박노진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요.

큰 아들이 지금 곁에 와서

“엄마 같이 좋은 엄마가 없어요”라고 한 한마디에 나는 너무도 행복해집니다.

영어 숙제로

지금까지 커 오면서 자신을 자신되게 한 일들에 대해 적는 숙제를 하느라

갓난아가 때부터의 사진첩을 죽~~보는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 옆에 와서 전해주고 간 아들의 그 한마디에 힘이  더 나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혁아! 엄마도 그래.  너처럼 이렇게 착하고 좋은 아들이 있어서

엄마는 행복하단다.”라고 한마디 건내주는 제 마음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청소년기를 맞은 아들들을 보면서

영육을 건강하게 키워주시는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내가 청소년기에 있는 우리 아들들과 주변의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수강 과목에 넣은 청소년교육((Adolescent Education)을 공부하면서

나의 청소년기를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봅니다.

저는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아래 7남매의 여러 형제들이 함께 자랐습니다.

오빠 셋 언니 둘 그리고 저와 제 남동생입니다.

큰 오빠와는 20살 차이가 나다보니 큰 오빠는 마치 아버지 같기도했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이 자랄 때는 정말 많이 어려운 시절이었다고합니다.보릿고개가 있었던 시절이었다니요

그러나 제 바로 위의 오빠 때부터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서 저와 제 동생은

그래도 좋은 시절에 지낸셈이지요.밥을 못 먹은 경우는 없었으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시골이라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제가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부모님과 형제들의 풍성한 사랑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정말 성실하시고 정직하시고 바르게 사신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맏이인 제 친구들의 조부모님 정도의 연세시기에 그러했는지 아니면 제가 워낙 착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크면서 부모님께 짜증내거나  때를 쓴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큰오빠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정말

너무도 다 무던하게 착실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모님께 염려를 드리지 않으려고 마음들을 모으는 의좋은 형제였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잃은 사촌 오빠를 어머니께서 같이 키우셨기에 8남매나 다름없었지만 모두가 정말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 분위기로 인해서

저 역시 삶이 즐겁고 감사하고 늘 좋았기에

청소년기를 방황함없이 순조롭게 잘 지냈습니다.

 중학교 갈 때 교복을 언니 것을 물려 입을 때는 정말 저도 새 옷을 맞추어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 생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말을 하면 어렵지만 꼭 해 주실 어머니셨기에 그런 맘을 숨길 수가 있었고

언니 것 물려 입는 것이 창피하지가 않았었습니다.

고등학교 갈 때는 어머니께서 제 마음을 아셨던지 새 교복을 제 것으로 맞추어 주셨지요.

중학 3년 동안은 반장을 했기에 더욱 즐겁게 잘 지냈고

남녀 공학인 시골 중학교라서 남학생들이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어려운 학생이기도 했던가 봅니다.

저는 좀 어렸던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였던지 모르지만

제 주변 남학생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비해 주변 여학생들은 벌써 이성친구를 갖고 편지하고 만나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선발고사제인 안동에서 안동여고를 갈려면 시골 중학교에서는 한 손에 드는 몇 몇만  갈 수가 있었는데

집안 형편상 시내에 학교 다니는 것이 어렵지만 공부를 잘 한 덕분에

안동여고에 합격이 되어서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면서 다녔습니다.어머니께서 정말 시험이 떨어졌으면 싶으셨다고 말씀 하실 정도로 농사 지으시면서 연로하신 부모님의 경제 사정은 어려우셨는데 감사하게도 졸업까지 잘 할 수 있었음도

그 때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였습니다.아버지께선 항상 저가 시간을 잘 타고 나서 복이 많다고 하셨어요,저가 하면 또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시면서요,예수님을 믿지 않으셨기에 부모님은 태어난 시간을 많이 말씀 하시면서 저가 시간을 잘 타고 났다고 어려서부터 늘 말씀해 주셨습니다.그래서 인복도 많다시면서요.자라오면서보니 정말 아버지 말씀이 다 맞는 것 같고 저가 예수님 믿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다~~~또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드리게 됩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여고 2학년 때까지

한 6년 정도 마음으로 참 좋아한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반에 전학 왔던 아이인데 새로 전근오신 선생님 아들이었지요.

시골 아이들과 다르게 참 단정하고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뭔지 모르게 처음으로 제게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 아이였지요.

같은 반이여도 거의 말할 겨를도 없었고

제가 초등학교 땐 줄곧 6년 동안 부반장을 했는데.

그 당시 시골 초등학교에선  남자가 반장 여자는 부반장을 하는 것을 무슨 법칙같이 하던 때라서

표가 더 많은 여학생이어도 반장은 남자를 시켰었는데 그땐 저도 왜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지 모르겠고 그것이 더 좋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학급일을 하다가 종종 마주치는 경우가 있어도 별로 잘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과학 경시대회가 있어서 안동 시내에 함께 갈 기회가 5월 어느 날 있었는데

그 아이가 꽃무늬 옷을 입은 제게

“옷이 참 이쁘네”

라고 해서 너무도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항상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아이도 별로 말이 없었지요.

그런데 중학교 입학을 하고 몇 달 후에 그 아이가 시내로 전학을 갔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가끔 운동장에서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는 준이를 보면서 혼자

좋아했던 저 였는데 참 아쉬웠지요.

그 때부터 저는 늘 일기를 쓸 때 그 아이에게 이야기 하듯이 나의 일상을 적곤 했습니다.나중에 언제라도 기회되면 꼭 만나보고 싶은 마음으로요.

제 청소년기를 돌이켜 보면 오직 생각으로만 만나는

 이 아이 덕분에 제가 참 사랑스럽게 저를 훈련하고 절제하면서 제 사춘기도

잘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문제없이 착하게 잘

지냈던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임을 알지만요.

고등학교 때 많은 아이들이 벌써 남자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학교에 오면 그런 이야기들도 많이 했지만

저는 정말 다른 어떤 남자 아이도 관심이 가지 않았었지요.

혹시라도 안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면 당연히 안동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지나가면 한번씩 더 관심있게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고2학년 어느 가을 날

하교를 하면서 버스를 탔는데 정말 우연히 전근을 가신 그 아이의 아버지인 서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얼마나 반갑던지요.그 아이 소식을 들을 수 있겠다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더군요.

제가 안동여고에 다니는 것을 많이 축하해 주시면서 선생님도 반가와 하셨지요.

“준이랑 순이도 잘지내지요?”

-“그래 ,그런데 우리 준이는 안고를 못가고 경고를 갔단다.”라시는

선생님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 속으로 얼마나 실망이 되었던지 모릅니다,

‘얘가 전학가서는 농땡이 쳤나보구나, 성실하지를 못했고…..’싶은 이런저런 생각에 처음 소식을 듣고 싶어 기대하던 마음과는 영 달라졌지요.

그 날 저녁 제 일기장에서 그 아이를 작별하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으로는 안동고등학교도 못갈 정도로 공부도 안하고 논아이로 전해져오는 실망감이 참으로 컸었습니다.

공부 그 자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구나!싶은

실망감이 6년동안 고이 간직하면서 아끼고 좋아했던 그 아이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 내렸었습니다.

그 아이 나름대로 분명 그 학교에 못 간 이유가 있었을텐데 저는 제 기준과 판단에서

그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도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는 사람이다싶지만

그 때 소녀의 마음엔 큰 아픔이었기에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좋은 이미지에 흠이 난 것이었지요.

그래서 혼자 울기도 했던 시절이 바로 그 때였습니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서 실망하고 했던 저의 짝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6년동안 그렇게 마음으로 보고싶고 그리며 좋아했던 아이를

그렇게 쉽게 내 마음에서 몰아쳐 내어버릴 수가 있었을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래도 내 마음에 준이를 좋아하면서

보냈던 그 시절이 참 사랑스럽게 전해져옵니다.

정말  너무도 순진하고 순수하고 맑았던 시골 소녀의 짝사랑.

감히 제 자신의 소녀 시절을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 남편과 아이들이 제 짝사랑 친구 스토리를 알기에 가끔씩

준이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절 웃길 때가 있습니다.

중학교 동창 카페가 있어서 가끔 들립니다.

혹시나 준이의 소식도 있나 싶어 친구들의 소식을 읽는

제 모습을 보니

그 때 실망되어 몰아쳐내었던  그 친구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남아 있나봅니다.

친구들 앞에서 그 아이 소식을 묻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건강하게 성실하게 가정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 줄로 믿지만

혹시라도 안들었으면 더 좋았었겠다 싶은 뉴스가 있을까 염려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렇게 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정말 내 동창 준이가  좋은 가장으로 모법된 가정을 잘 이끌어 가고

있을거란 믿음으로 제 청소년기의 중요한 부분에  마음안에 함께 했던

소중한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꿈이 있고

맑음이 있어 행복했던

나의 청소년기를 돌이켜보면

정말 다시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때 하늘을 보면서

별을 노래할 수 있게 했던

시골 하늘과 들판의 모든 맑음들이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꿈을 갖고  푸르르게

자라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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