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열차 안에서


혹시 모르고 지울까봐

열차번호와 좌석번호가 적혀있는 문자메시지에 삭제방지를 해 놓고

다른 메시지는 정리를 해서 찾기 쉽도록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행신역은 KTX 차고지라서 시골 간이역 수준으로 허술합니다.

검표를 위해 서 계시는 역무원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그냥 들어가기에 따라가다가 보니

매표소 유리 안에 역무원이 멀찍히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손에 휴대폰을 든 채로 그분을 한 번 쳐다보고안내문을 따라 긴 계단과 복도를 지나

지정된 칸의 열차에 탑승했습니다.

휴대폰에 승차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그다지 산뜻하지 않습니다.

꼭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군사문화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던 탓이라항상 검사하고 확인하고 이런 것들이

몸에 습관으로 배어 있는 탓일 겁니다.

아마 자율이라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이겠지요.

비싼 표를 끊었는데 적어도 가위 같은 것을 들은 검표원이 체크를 하지 않았으면

안경 넘어 눈살을 가느다랗게 해 가지고 “5호차 7A석입니다.” 이렇게 얘기라도 해 줘야하지 않겠어요?

일건 열심히 숙제를 해 가지고 갔는데 선생님이 검사를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싱겁게 내 자리를 찾아서 들어가 좌석에 앉았습니다.

커다란 창가에서 멋진 풍경을 기대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나는 자리를 정리해서 앉았는데

내 옆으로 60대 초반의 부부와 신혼인 듯 젊은 부부가 함께 올라왔습니다.

나는 싱글석이고 그분들은 이인석이라 부부가 앉고 젊은 분들이 짐을 선반에

올려 주고 어색한 대화가 분주합니다.

애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봐서 초로의 부부가 갓 결혼해서 살림을 차린 따님 댁을

다녀가는 것 같습니다.

퉁퉁하고 편안하게 생긴 아저씨는 사위에게 부탁의 말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해야 하네, 잘 먹고 잘 자고, 싸우지 말고, 싸우면 못 쓰느니라

너도 이 서방 밥 잘해 미기고 다투지 말고 남편 말에 순종해라, 살림 알뜰하게 살고."

남편의 진지한 말에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한마디 거들만 한데 시큰둥하게 딴청을 핍니다.


장인의 훈시가 끝나자 젊은 사위는 봉투를 하나 장인에게 건넵니다.

"뭘 이런 걸 다…괜찮으니까 살림에 보태 쓰게." 이러며 말로는 사양을 하지만

양복 주머니에 들어온 봉투를 꺼내서 돌려주려는 제스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아저씨께 있는 듯 아주머니는 시종 아무 말이 없습니다.

겨우 "어서 들어가라 이 서방 출근해야지. " 이러다가

"오늘 일요일이여. “

"엄마는 오늘이 일요일이잖아 이서방 회사 안가."

남편과 딸 두 사람에게 동시에 타박을 듣습니다.

그러고도 애가 생기기 전에 돈 모아야 한다는 등 장인의 설교는 길었고

작별인사 또한 분주하게 한참을 주고받더니 사위와 딸이 기차에서 내립니다.

젊은 내외가 가고 기차가 출발하자 아저씨는 뒷자리로 후다닥 옮겨갑니다.


차량하나에 그 내외분하고 나하고 세 명이서 행신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위가 끊어준 특실에서 두 분이 나란히 앉아가면 좋으련만

사위에게 사이좋게 살라고 훈시를 할 때와는 달리 아내를 혼자 두고

뒤로 떨어져 가서 앉는아저씨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둘이 나란히 앉는 것 보다 뒷자리에 혼자 앉는다고 해서 별스럽게 편할 것도 없는 상황인데

아내와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아저씨의 속셈이 들어나 보여서

남편의 훈시에 아주머니의 시큰둥한 표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아저씨가 앉은 좌석을 찾는 사람이 있거나 만석을 이루기 전에는아저씨가 아주머니

옆으로와서 나란히 앉아 가기는 틀렸습니다.

아저씨가 뒷자리로 옮겨가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부스럭거리며 봉투에서 돈을 꺼내 세는 가 봅니다.

호기심에 나도 속으로남의 돈을얼떨결에 셌습니다.

하나 둘 셋… 10만 원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돈을 아내에게 건네주는 가 했더니 끝내 자기 주머니로 들어가고 맙니다.

아주머니가 힐끔 아저씨를 돌아다 봤습니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고 부부는 각자 자기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고요해 집니다.

아주머니의 심정이 되어 나도 그 아저씨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운하다고 할까?

초로의 부부가 다정하게 기차여행을 하는 모습을 관찰 했으면 했는데

나로서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


이 나이 먹어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은 정말 싫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 공부하라고 새벽마다 깨우셨는데 그 시간이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평소엔 듣기 좋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목소리도 새벽잠을 깨우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실 땐 정말 싫었습니다.

모자라는 잠을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며 보충하기도 했는데

위험한 재래식 화장실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 기적 아닌 기적입니다. ^^

새벽잠을 잘라먹는 일이 지금도 나에겐 최고의 고문입니다.

평소에 잠이 깨었다고 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바비큐를 하듯이 몇 바퀴 몸을 돌려가며 뒤척여야 겨우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침에 내 몸의 리듬이 허락하는 시간에 깨어야 기분이 좋은데

약 한 시간 정도를 일찍 일어났더니 졸음이 몰려옵니다.


행신에서 출발하여 서울역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잠이 들었다가

비몽사몽간에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기는 한 것 같은데

그만자고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보니 동대구역이라는 멘트가 나옵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따뜻한 커피한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화장실이 있는 객차와 객차 사이로 나갔더니

빨간 제복을 입은 승무원 아가씨가 “뭘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습니다.

커피 한잔 먹고 싶다고 했더니 캔 커피를 하나 주려고 합니다.

캔 커피는 내가 싫어하는 거라 자판기나 따뜻한 커피 없냐고 물으니

난처해하면서 없다고 합니다.

물을 드시겠냐고 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생수 한 병과 비스킷 한 봉지를 줍니다.

뭐라도 먹어야 정신이 나겠기에 받아 들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습니다.

부스럭 거리며 센베이 같이 생긴 납작한 과자를 먹고 물을 마시자

커피는 마시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정신이 차려 졌습니다.


일요일 오전인데도 객실은 삼분의 일도 차지 않았고 조용하고 아늑했습니다.

가끔 바라본 창밖은 색이 조금씩 바래보이고 들판에 벼들도 누렇게 그냥 있습니다.

심심풀이를 위해 들고 간 정이현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찾아 들었습니다.

90년대로 상징되는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삶과 돌연히 마주치고

서태지가 나오고 월드컵 운동화가 나오고 허재를 좋아하는 소녀가 등장하면서

비유적으로 현재에 갇힌 등장인물들이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만든 매뉴얼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그려나갑니다.

"오늘의 거짓말"에서 등장인물인 "그녀"들은 타인의 고통을 은폐시켰던 자신의 과거와

모든 인간관계의 장을 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해서

위선 적으로 자신을 위무할 수만은 없기에 회의 하면서도 안도하는

현대인의 섬약한 모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72년생의 깜찍한 소설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가변성을 가지고

기분이 묘하게 나빠질 만큼 우리의 부조리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책에 빠져 있다가 밀양을 지난다는 멘트에 머리에 얹었던 안경을 내려 씁니다.

부산을 온 목적에 맞도록 코드를 맞추어야 합니다.

열차 속 초로의 부부에게서도 소설 속에 빠졌있던 것에서도 마음을 꺼내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언제 부산을 다녀올지 걱정이 되시겠지만 이번 주 안에

돌문어 먹은 얘기랑 결혼식 얘기랑 다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휴대폰 메시지로 기차를 탈 수 있다는 것과

무임승차 같았다는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겨우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

순이

3 Comments

  1. 봉천댁

    2007-10-15 at 05:42

    아..

    그렇게 타는거군요..

    저도 KTX 한번도 못타봐서요..

    부산 잘 다녀 오시구요.. ^^

       

  2. 김진아

    2007-10-16 at 00:39

    ^^
    저두요…한번도 타보질 못했어요..
    키미테 붙여서,
    고속버스는 타보았지만…

    순이님의 잔잔한 물처럼,
    정경이 그려지듯..

    다음이야기..기다려집니다.
       

  3. 부시시

    2007-10-16 at 01:56

    .. 소심 ..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