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엄마 같이 자녀에게 선행학습 시킨 아버지

가나다라를 배우고 처음으로 문장을 붙여 쓴 글이
"아버지 호 내다."입니다.
“호”는 “혼을 내다.”의 혼을 잘 못 쓴 말입니다.
“아버지께 야단맞았다.” 이렇게 써야 맞는데 서운한 마음을 기록하고 싶은데
아직 글을 배우는 단계이고 문장 쓰는 법을몰라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우리 아버지 섭섭하실까봐 아버지 이야기도 합니다.
전쟁 후에 (1950년대) 태어난 우리 형제에게는 이웃의 친구 아버지와 다른
교육열이 대단하고 자녀교육에 열심이신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8,90년대 강남 엄마 같은 모습이라면 맞을 그런 아버지셨습니다.
그 옛날 이웃 아버지들은 다들 농사에 골몰하시느라
자녀들이 학교를 가는지 뭘 배우는지도 모를 때입니다.
농번기가 되면 자녀 학교 가는 것을 붙잡고 일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학교는 놀러 가는 줄 아는 부모님들도 계셔서
남자들은 소먹이나 모네기 철에는 못줄이라도 잡아 달라고 하고
여자들은 동생을 업어 키워야 하고 들에 물주전자라도 들어 날라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농사지을 땅도 없었고 목사님이라
동네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물감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창피하게 여길 때라 교인들은
사는 게 어렵고 친척도 없고 어디 위로받을 대라곤 없는
불쌍하고 어려운 여자 분들이었습니다.
혹간 남자 분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비료포대 같은 종이에다 성경책을 싸서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가는 티를 안내고 동네를 빠져나와 남의 눈치를 보며
교회에 다니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신학문을 공부하신 분이라
"배워야 산다."는 명제가 있었습니다.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교회에서도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성경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자녀들에겐 지금으로 말하면 선행학습을 하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께 가나다라를 배웠고 아버지 앞에서 구구단을 외웠고
그림으로 사과를 쪼개 음악의 온음표 반 음표를 배웠습니다.
저녁이면 아버지는 희미한 불빛 아래 저녁상을 치운 두레반을 펴 놓고
아이들을 둘러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빠를 가르치실 때 나는 아버지 무릎위에 앉아서 오빠의 대답을
가로채기도 하다가 오빠의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는 어쩌다 하나 맞으면 아버지는 오빠에게 "동생보다도 못 하냐" 야단치시고
오빠는 어쩌다 하나 틀려도 혼이 났습니다.
그렇게들은 풍월도 내가 학교 다닐 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배운 한글로 가장 먼저 쓴 것이
아버지께서 나에게 서운하게 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썼으니 우습지요?
“아버지 호 내다“ 이건 아버지께 야단맞은 일을 기억하려고 아버지께서 읽다 둔
신문지 귀퉁이를 찢어서 써 가지고 바지주머니에 넣었던 글(!)입니다.
억울해서 잊지 말자고 썼나봅니다.
아마 동생과 싸웠나 본데 아버지는 나에게만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건 억울할 일도 아닙니다.
오빠는 나 때문에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늘 혼이 나는데
나는 동생 때문에 야단을 맞은 게 처음이었는지, 아버지가 늘 예쁘다고 하다가
처음으로 야단을 맞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지 서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야단맞은 일을 잊지 않으려고 저렇게 종이에 쓴 때가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6~7 세쯤 되었습니다.
그랬던 버릇이 남아선지 지금도 무슨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로 하기보다
쓰는 것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로는 다 하지 못해도
앞뒤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쓰다 보면 감정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땐 백일장에 나가 상도 받곤 했습니다.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로 부터 내려온 유산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버지로 부터 받은 좋은 유산입니다.
여자가 숟가락 10개를 다 셀 줄 알면 팔자가 나쁘다고 할 때
우리 아버지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신 선행학습은 결과가 좋습니다.
오라버니는 서울공대를 다니셨고 나도 환갑이 되도록 일할 수 있는 일을 가졌고
동생들도 대학교수들입니다.
이런 걸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의 공부에 관심을 가지고
집에서 잘 가르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학원을 보낼 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만 잘 가르쳐 놓으면
공부하는 습관이 들어서 공부를 절로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두레반에 둘러앉아 공부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나는 우리 손자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대리고 앉아서
우리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공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금은 가나다라를 외울 필요도 없이 수많은 동화책을 함께 읽고
사과를 쪼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피아노 앞에 앉아서
도레미파를 가르치고 온음표 반음표 음계를 가르치면 될 것 같습니다.
급격히 인지가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손자들 초등학교 공부는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데 사실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 시대라 요즘엔 공부도 인터넷으로 하더군요.

34년 전 설 며칠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직 내가 서른도 되기 전 20대 후반이라 아버지께 효도한 번 못하고
많은 자녀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가셔서 아버지 생각이 나면
몹시 죄송하고 아버지가 불쌍합니다.
지금껏 살아계셨으면 아버지와 영화도 보러가고 음악회도가고
책 읽고 토론도 하면서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엊그제 아버지 기일이 지나갔습니다.
형제들이 대구에 모여 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렸는데 전 못 갔습니다.

순이

4 Comments

  1. 데레사

    2015-02-16 at 09:32

    요즘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 오네요.
    설을 앞두고 모두 육친에의 정이 새삼 생각나나 봐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언니와 나를
    공부는 끝까지 시켜 주셨어요.
    그래서 늘 감사해 하지만 사실 효도 한번 못 해봤지요.

    명절 잘 보내세요.
    저도 내일부터는 좀 바빠질것 같거든요.   

  2. mutter

    2015-02-16 at 11:59

    내가 9살때
    우리가 살던 초가집 문간방에 ‘예수장이"부부가 세들어 살았습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면 문간방 부부를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 분들이 제사음식을 앞에두고 기도를 하고 먹었습니다.
    참 희안한 광경이었고 그들이 별나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한차원 높은 사람으로 내게는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2-3년후부터 나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사 아버님의 교육열이 부럽습니다. 우리집은 사탕공장 다니지 않고
    공부하러 다닌다고 섭섭해 하셨습니다.
    추운겨울에도 노점에서 장사를 하시던
    내 어머님이 사탕공장 다니는 집 딸들을 부러워 하셨습니다.    

  3. dotorie

    2015-02-16 at 15:42

    저학년일때 공부하는 습관이 들면
    크면서도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는 말씀을 경험했고
    전적으로 공감 합니다.

    저도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이억만리에서 불편없이 살고 있음에 항상 감사 하지요.   

  4. 연담

    2015-02-17 at 01:05

    저도요!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에 학력열등감 없이 이세상 살아가고 있어요.
    고생하시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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