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거면 집에서 자야지 음악회에가서 졸다니

오래전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자주 다녔습니다.
아람누리가 생기고 부터는 세종문화회관도 멀다고 안 가게 되고
일산 안에서 해결이 가능하니까 아람누리를 열심히 이용합니다.
큰 음악회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은 일산에서 왕복 4시간 이상 걸리고
세종문화회관은 두 시간조금 넘게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주 시간까지 합치면 예술의 전당을 다녀오려면 하루를 거의 다 소모해야 하고
세종문화회관은 5~6시간이 드는데도 중요 음악회가 있으면
시간을 쪼개 열심히 다녔습니다.

오래전 정경화와 러시아 키로프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보러 갔을 때 일입니다.
바로 앞에 앉은 남자분이 정말 열심히 주무시더군요.
부인이 옆구리를 찔러서 깨워 놓으면 겨우 정신을 차리는 듯하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들어가 고개를 좌우로만 떨어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뒤로 갑자기 젖혀져서 남자의 정수리가 내 눈앞에 보이면
음악을 듣다가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엔 그 옆에 앉은 여인이 깨우는 것을 포기하자 남자는
편한 자세로 끝까지 코를 골면서 잘 주무셨습니다.
그 남자에겐 음악이 자장가로 들렸나 봅니다.
특급호텔에서 두 밤은 잘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낸 VIP 석에서 음악은
잘 들리지만 잠자기에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 왜 잠을 잘까 의아했습니다.
집에서 주무시지 왜 저렇게 본인도 힘들고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을 할까
한심하고, 아마 공짜 표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일거라고 짐작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음악회에 가서 조는 일이 남의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감흥도 여전하고 음악회를 기다리는 설렘도 계속 되지만
나도 모르게 음악회에 가서 졸아서 화도 아니고, 짜증도 아니고
연민도 아닌 어떤 감정이 내 스스로 생깁니다.
왜 이러지?
그 좋은 음악을 듣고 있는데 왜 졸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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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일산 아람누리에서 요엘레비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낮 동안 친구들을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메르스 때문에 회갑여행을 가려던 계획을 거액의 위약금을 물고 취소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분위기라 6월 모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두어 달 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반가워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귀가하는 길에 아람누리 음악회를 간 것입니다.

아람누리에서는 마티네 콘서트가 1년에 5번 정도 있고
기획행사로 아람누리 심포닉 시리즈가 3번 정도 있습니다.
시대별 두 작곡가의 대표작을 통해 살펴보는 교향악의 발전사를 볼 수 있고
참여하는 오케스트라도 수준급이라 미리 예매를 했다가 가게 되는 프로입니다.
마티네 콘서트와 심포닉 시리즈를 하는 아람누리 자체 기획음악회가 8번 정도 되고
그 사이에 좋은 음악회가 있으면 가게 되어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음악회에 갑니다.
2015년엔 아람누리에서 20세기 민족주의 음악을 확립시킨 북구의 거인들
드보르자크와 시벨리우스를 기획했습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도 좋지만 KBS교향악단의 연주와 요엘레비의 지휘를 본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기다려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음악회에 가서 졸았다는 사실입니다.
음악도 좋았고 대 편성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더없이 황홀한 지경인데
왜 잠이 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음악회에 가서 존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마크 페드모어라는 영국 가수가 겨울 나그네를 부를 때도 졸았습니다.
마크 페드모어의 노래는 이층에서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울림이 크지 않았고
맑게만 들려 비탄의 느낌 보다는 아름답고 고요한 목소리를 듣자니 졸리기도 했습니다.
내 옆의 관객도 그 옆에 앉은 여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졸고
내 앞에서도 고개가 뒤로 깜빡 깜빡 넘어왔습니다.
나도 직장 회식이 오후 다섯 시부터 있어서 삼겹살을 구워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간 길이라 어느 순간 잠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아람누리에 도착해서 겨울 코트를 벗을까 하다가 그냥 입고 앉았더니
식곤증에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노래 소리는 아련히 들리고 졸음이 몰려와서
자주 머리를 흔들어 잠을 털어내야 했습니다.
겨울이고 혹독하게 날이 추워서
"겨울 나그네"가 제 맛으로 들리겠구나!
기대를 하고 간 공연이었지만 회식 후 배가 잔뜩 부른 상태라서
겨울 나그네를 겨울 나그네로 듣지를 못하고 자장가로 들었습니다.

그날은 회식 후라 그렇게 졸렸나 했는데
지난 토요일은 왜 그렇게 졸렸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일이 힘들었나?
조는 일이 잦아지니 음악회 가는 일이 두려워집니다.
누군가 내가 조는 모습을 보면 웃긴다고 할 것 아닙니까.

대중음악이나 연극 같은 것은 누구라도 함께 관람하는 것이 좋지만
클래식은 혼자 즐기는 것이 몰두하기에 좋고 행복했는데
이제는 음악회에 함께 가서 졸면 깨워줄 동지를 구하던지
아니면 음악회 가는 일을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

순이

3 Comments

  1. 벤조

    2015-07-23 at 04:03

    음악회 갈 때까지 너무 바쁘고 분주하고…그러다 의자에 앉으면 포근…
    저는 시끄러운 뮤지칼 앞자리에서도 졸았습니당. 코도 약간 골았다네요.
       

  2. 고운바다

    2015-07-24 at 14:18

    음악회에서 조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요.문제는 고속도로에서
    조는 것입니다.두어달 전까지만 해도 고속도로에서는 바짝
    긴장해서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늘 연이어서
    고속도로에서 졸았습니다. 익숙한 길이니 차선따라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가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옆차선으로
    차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차 싶어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또 눈이 슬슬 감기는 것입니다.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닌데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군요. 이러다가 생명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싣고 다니는 "가요박물관"CD에서
    씩씩한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면서 무사히 귀가 하였습니다. ^^

    귀신잡는 용사 해병 /우리는 해병대
    젊은 피가 끓는 정열 / 어느누가 막으랴
    사랑에는 약한 해병 / 바다의 사나이
    꿈속에서 보는 처녀 / darling, I love you!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
    헤이빠빠리바 헤이빠빠리빠 ^^
       

  3. 소리울

    2015-07-24 at 21:19

    성당 미사에도 조는 사람입니다.
    ㅋㅋ
    어쩝니까? 하느님이 기특하다. 열심히 일하다가 여기서라도 쉬어라 그런다네요.
    그러니 세상에 남 흉볼일은 하나도 없는 거더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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