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 사칭, 독거노인 아니라고 욕 베틀을

하얀 쌀알같이 생긴 아랫니 두개가 쏘옥 올라왔고
윗니도 두개가 나오고 있는 까꿍이의 이유식을 먹이는 일이
요즘 들어 나의 대단한 일거리가 되었습니다.

아기 이유식 전용 찜기가 있는데 쌀과 닭 가슴살 당근 양배추 호박 같은 것을
넣어 찐 후에 부드럽게 갈아서 죽 같은 상태로 아기에게 먹입니다.
조그만 숟가락으로 떠먹이면 까꿍이는 흘리기도 하고 뱉기도 하고
푸~ 불어내기도 하고 맛없으면 안 먹기도 합니다.
배나 사과 바나나 같은 과일을 갈아서 섞으면 좀 잘 먹기도 하는데
아기가 단맛에 길들면 안 된다고 해서 아주 조금 밖에 넣지 않습니다.
까꿍이는 조그만 입술을 열어서 분홍색 혀를 날름거리며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받아먹는데 그런 아기를 보는 것은
할머니라서 그런지 생명의 경외감마저 드는 일입니다.
나는 어미 젖 만으로는 부족한 영양이 채워지겠지 싶어서 아기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야~까꿍이 잘 먹는다. 옳지! 꿀꺽~꿀꺽~" 온갖 소리를 내며 아기 비위를
맞춰 가면서 준비한 한 공기를 아기에게 다 먹이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한지 모릅니다.
농부는 가뭄에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고
부모는 흉년에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하잖아요.
나는 빈 밥그릇을 보면 흐뭇해서 아기의 팔다리를 주물러 보고 배도 만져보고
등도 두드려 주면서 즐거워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고 트림을 시키고 물도 먹이고 하다보면
아기에게 이유식 한 공기를 먹이는데 족히 한 시간은 걸립니다.

아기에게 이유식 먹이느라 아기의 집중을 위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온갖 소리를 입으로 내면서 놀이 겸 떠먹이고 있는데 집 전화벨이 울립니다.
요즘엔 집 식구들이 각자 자신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니
집전화가 울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정말 어쩌다 무슨 선거사무소에서 사전조사 같은 것을 위해 전화를 걸어오거나
학원 같은 데서 아이 학원 보내라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전화가 대부분입니다.
어머니가 계실 땐 어머니 안부를 묻는 전화가 심심찮게 있었지만
요즘엔 어머니께서 대구 아들집에 계시니까 올 전화도 없으니
필요 없는 전화라 반납을 해야 하는데 새삼 그러기도 귀찮습니다.
그러니 전화가 꼭 있어야 할 필요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인터넷 요금에 묶여 있어서 집 전화 요금이 얼만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쓸데없는 전화인 것은 알지만 전화벨이 울리는 이상 안 받을 수 없어서
아기 이유식 숟가락을 손에 들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했더니 잠시 후에 기계음이 납니다.
여자 목소린데 녹음된 내용을 돌리는 내용입니다.
"귀댁의 전화가 오늘자로 끊기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들으시려면 0번을 눌러주세요." 라는 멘트입니다.
한 달 내내 한 통화도 전화를 안 하니 전화국에서 수익이 없어서
우리 집 전화를 끊으려나보다 생각이 들어서 얼른 0번을 눌렀습니다.
"네 한국통신입니다." 라고 남자가 경쾌한 톤으로 받는데 말투가 조금 이상합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라고 전화를 끊는 이유를 알려고 사무적으로 물었더니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나는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그쪽에서 하셨는데 누구에게 전화를 하셨는지요?"라고 하니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혼자 사시는 군요."이럽니다.
난 어리둥절해서 "아닌데요? 식구들이 많아요." 이랬습니다.
마침 이유식을 받아먹다가 전화를 받느라 떠먹이는 걸 못했더니
아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 갔겠지요.
상대편 남자는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면서 욕을 합니다.
"이런 18 한국통신이라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러더니
욕 베틀을 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수화기를 놓고 말았습니다.

그 남자는 개그콘서트에서 하던 황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조선족 같은 말투로 자기 분을 풀지 못해서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표준어를 쓰는 듯 했는데 화를 내니 이북사투리 비슷한 어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자신의 의도가 들통 나지 않았는데도 미리 자신의 성격을 드러낸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심한 욕을 먹고 났는데도 웃음이 났습니다.

요즘엔 회사나 관공서가 아니면 집 전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집 전화를 사용하는 세대는 독거노인 층이란 계산을 한 것 같습니다.
혼자 사는 노인을 목표로 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식구들이 많아요. 하니까
상대방의 화를 돋운 게 되었던 겁니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 집 전화까지 끊긴다면 그것은 외부와의 단절의 의미하니까
어떡하든 전화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이스 피싱을 해도 혼자 사는 취약한 노인계층을 노리는 것은
더 비겁하고 죄질이 나빠 보입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계시는 노인에게 뭘 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조금 더 오래 통화를 해서 그들의 수법을 알았으면 좋았을 건데
상대방이 너무 일찍 신분을 드러내는 바람에 욕만 잔뜩 먹었습니다.
검찰청이니 금융감독원이니 경찰서니 우체국이니 별 군데를 다 사칭을 하더니
이제는 한국통신이라고도 하는 군요.

순이

5 Comments

  1. 데레사

    2015-09-24 at 16:32

    하여튼 벼라별 방법으로 보이스피싱을 하더군요.
    나도 그런 전화 몇통 받았습니다.
    어떻게 내 휴대폰이 약정기간이 다 된줄 아는지 새 폰을
    집으로 배달해 주겠다고 이름을 가르쳐 달라나….. 나도 순이님과
    똑 같은 식으로 말해줬지요. 그런데 그사람은 욕은 안했어요. ㅎㅎ

    추서 잘 보내세요.   

  2. 좋은날

    2015-09-25 at 01:21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막욕을 퍼붓더만요.
    황당하고 어이상실.

    말투 어감에서 금새 눈치 채겠더만
    어르신들은 속습니다.

    피해액이 몇백 억 규모라니 공공의 적
    사회문제입니다.

       

  3. 선화

    2015-09-25 at 11:33

    저도 뭍에 살때…ㅎ

    연변 말투가 있어서 "보이스피싱 하려면 니네 연변에서나 하시죠? "
    하고는 끈었습니다/ 근데 요즘은 연변 말투가 아니라는데…??? ㅎ

    암튼 속지말고 잘 삽시다!!!   

  4. 노당큰형부

    2015-09-25 at 13:50

    그런 전화 참 많죠?
    욕을 먹더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5. 말그미

    2015-09-27 at 11:47

    ㅎㅎㅎ
    까꿍이가 우리 준호 동생 기안이와
    참 비슷하네요.
    요즘 이유식을 먹고 하얀 이가 쏘옥 두 개가 난 걸 보니…

    그 보이스피싱 수작이 어설프네요.
    웃음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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