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쓰라
우리 어머니께 천 번도 더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태어나서 90년을 살면서 아직도 아쉬움이 많은 그런 사연입니다.
어머니가 살던 동네에 혹세무민하는 엉터리 점쟁이가 있었나 봅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먹고사는 어둡고 힘든 시대에 동네 대소사의 길일을 잡아주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무슨 약초를 달여 먹으라고 하는 등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니 사람들이 그 점쟁이의 말을 신뢰했던 겁니다. 그 점쟁이가 우리 어머니를 “단명할 운”이라고 했답니다. 위로 오라버니 세 분이 있고 고명딸로 태어난 귀한 딸인데 오래 못 산다고 하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몹시 슬퍼했다고 하는군요.
8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오래 살지도 못할 아이가 공부는 해서 뭐 하느냐고, 고생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하면서 학교를 보내주질 않았답니다. 선생님이 찾아와서 따님을 학교에 보내라고 부모님께 사정을 해도 “여아가 고생스럽게 공부는 해서 뭐 하냐?”고 학교를 못 가게 해서 어른들 눈을 피해 억지로 3일을 학교에 갔답니다. 어른들께서 아시고 학교 가는 걸 막느라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조카를 등에 업혀 놓아서 더는 못 가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그 엉터리 점쟁이 때문에 공부를 못 했다고 한스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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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신에도 자녀들이 모였는데 그 말씀을 또 하시는 겁니다. 어머니는 정식으로 학교는 안 다니셨어도 아쉽지 않게 글을 읽고 쓰시는데 공부를 못 한 데 대한 한이 많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

어머니가 70대에 쓰시던 성경책을 들추어 보면 곳곳에 서툰 글씨의 메모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발견되는데 노년에 들어서면서 외로움에 대한 토로가 많았습니다. 일기 형식으로 쓰기도 하고 한 줄로 된 글도 있고 한데 지금껏 잊히지 않은 글은
“지짐을(부침개) 했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지짐을 많이 해도 남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음식을 해도 먹을 사람이 없다. 나도 맛이 없다.”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땐 음식을 많이 한다고 해도 남아나는 것이 없었는데 자녀가 다 장성하여 둥지를 떠나자 음식이 남는 데 대한 한탄이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공부를 하셨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어머니는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도 없었고 일본으로 처녀를 공출해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8살에 결혼해서 자녀를 기른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이제 80세쯤 아실 정도로 인지가 많이 저하되었습니다. 큰 딸이 몇 살인지 막내아들이 몇 살인지 그런 것은 명확하지 않으신데 과거의 기억들이 너무도 선명한 것에 놀랍니다. 그중에도 몇 가지 레퍼토리가 있는데 항상 처음 하듯이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처음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치며 들어 드리고요. 어머니가 만약에 인지저하가 오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이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듯합니다.

어머니가 구십 대가 되도록 하고 싶은 일이 글 쓰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글에 대한 염원이 지금도 저러한데 나는 이제라도 글 쓰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우리가 보낸 순간’ 중에서, 김연수

3 Comments

  1. 데레사

    2018-12-29 at 01:09

    어머님이 아직도 고우신데 인지저하가 시작
    되셨나 봅니다. 안타깝고 서글퍼요.
    배움에 대한 한이 지금도 남아계시는 어머님이시니
    그때는 얼마나 공부를 하고 싶었을까요?

    오래오래 더 나빠지시지 말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2. 김수남

    2018-12-29 at 03:09

    네,언니! 어머니께서 그러셨군요.저희 어머니랑 이야기가 너무 비슷합니다.제일 아래 왼쪽 언니랑 찍은 사진의 어머니 밝고 예쁜 윗 옷이 정말 저희 어머니 것이랑 너무 흡사해요.
    어머니가 그리워 저가 가지고 왔는데 종종 입을 때마다 엄마 생각 나서 가슴 뭉클해집니다.
    인지 기능은 좀 떨어지셨지만 옛 기억은 또렷이 하심도 감사합니다.
    잘 장성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뤄 잘 사시는 자녀들 가족들 보시면서 더욱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를 잘 지내시길 기도합니다.언니의 글 중에 저는
    어머니 소식이 제일 반갑고 좋아요.감사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더욱 건강하시며 아름다운 기도의 응답을
    주렁주렁 맺어 가시길 기도합니다.사랑하며 축복해요

  3. 비풍초

    2018-12-29 at 21:07

    일기를 매일쓰는 사람도 있겠고 며칠에 한번 정도 쓰는 사람들도 있겠는데, 저는 연초에 50년치 일기를 두어달에 걸쳐 썼습니다. 내가 기억나는 걸 모두 썼습니다.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것 중에는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잊혀지는 게 더 좋을 듯한 것을 굳이 기록으로 남겨두기 싫어서 일단 쓰기를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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