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대부’ 스티븐 블랭크

이 글은 2014년 7월12일자 위클리비즈 2면에 실렸던 기사를 확대 보완한 작품이다.


“전설적인 영웅은 대개 무언가를 창건한다. 새로운 시대를 개시하거나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며 도시를 세우고 생활 양식을 만든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면 낡은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발상에 매진해야 한다. 움트기 시작한 발상이 곧 새로운 도약의 잠재력이 된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외곽 페스카데로. 네비게이션도 잘 찾지 못하는 한적한 전원에 ‘실리콘밸리의 대부(Godfathers of the Silicon Valley)’로 불리는 스티브 블랭크(Blank·61)의 별장(ranch)이 자리잡고 있다. 파랗게 펼쳐지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카브릴로 고속도로를 20여분 달리자 별장 입구가 나왔다.

카브릴로 고속도로는 이렇다.

카브릴로 고속도로는 이렇다.

정문을 지나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3~4분쯤 운전해 들어가자 그림 같은 하얀 2층 저택이 나타났다. 이 올라가는 길 모두가 그의 땅이다.

멀리 보이는 그의 별장.

멀리 보이는 그의 별장.

마당에는 ‘역시’ 테슬라 전기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테슬라

스티브 블랭크는 스티브 잡스처럼 대학 자퇴 후 억만장자가 된 실리콘밸리의 전설 중 하나다.(우리에겐 낯설지만 이 ‘계곡’에선 아주 유명하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도 그를 알고 있었다.) 미시건대 입학 후 학업에 흥미가 없다고 판단해 비행기 정비 일에 뛰어들었다. 이후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78년 실리콘밸리에 처음 발을 디딘 뒤 지금까지 벤처기업 8곳 설립에 참여, 이 중 4곳을 상장시켜 갑부가 됐다. 그 중 하나인 CRM 개발회사 E.piphany는 3억2900만달러에 매각되기도 했다.

블랭크가 직·간접적 경험을 집대성해 지난해 펴낸 ‘기업 창업가 매뉴얼(Startup Owner’s Manual)’은 젊은 벤처 지망자들에게 바이블로 통한다. 지금은 주로 UC버클리와 스탠포드대에서 창업 교육 과정을 주관하며, 미래의 ‘스티브 잡스’를 발굴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블랭크가 벤처기업 창업에 있어 강조하는 것은 일명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전략. 원래 일본 도요타 자동차 ‘린 제조(lean manufacturing)’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제자였던 벤처 기업가 에릭 리스(Ries)씨가 만든 말이다.

요약하자면 아이디어를 빠르게 최소 요건 제품(시제품)으로 일단 제조한 뒤 내놓아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다음 제품 개선에 반영하는 전략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제품을 만들고 성과를 측정해 다음 제품 개선에 반영하는 것을 반복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식. 몸집이 가벼운 벤처기업 생리에 딱 맞는 창업 전략이다. 드롭박스, 에어비앤비 등이 이런 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스타트업(갓 창업한 회사)에게는 스타트업에 맞는 방식이 있다. 대기업에서 통한 방식을 무조건 적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블랭크 홈페이지 http://steveblank.com/ 에 더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블랭크 (1)

-‘기업창업가 매뉴얼’ 책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한국인들은 그 책의 한국 버전을 써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일군 놀라운 성과를 목격했고 감탄했지만 그 혁신을 가져온 문화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기업 주도형 혁신이라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고 흥미롭다. 어떻게 그런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영어로 설명한 책을 아직 못 봤다.”

-당신은 유연한 기업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한국 기업들은 사실 경직되고 수직적인 구조와 문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성공이)마술 같다는 거다.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한국 항공기 사고들도 그런 수직적 문화 때문에 유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1997년 대한항공 괌 사고 원인을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 어떻게 그 문화 장벽을 넘어서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계속해서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젊었을 때 잠시 반도체회사 자일로그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영업팀장이 와서 ‘못 믿을 일이 벌어졌어. 한국이 마이크로 프로세서 라이선스를 1000만달러에 사겠데. 걔네는 절대 칩을 못 만들 거야. 우리 디자인 다 넘겨도 돼’라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이 회사는 금성반도체, 지금의 SK하이닉스였던 걸로 추정된다) 그랬던 한국이 지금은 세계 최대 반도체 강국이 됐다.”

별장 내부 1층 모습.

별장 내부 1층 모습.

– 린스타트업 철학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작은 버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MBA 과정은 대기업에서 배운 방식과 규칙, 과정을 전달하려 하지만, 스타트업은 대기업과 다르다. 스타트업에게는 실행, 더 빠른 실행이 중요하다. 시작부터 남달라야 한다는 건 강박 관념일 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낳지 못한다.

스타트업의 ‘비전’이란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며, 고객 검증이 필요하다. 실패는 스타트업이 비즈니스 모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겪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스타트업이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답은 현장에 있다. 고객과 접촉하는 가운데 기민하게 시제품을 보완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객은 창업자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업 희망자들에게 항상 ‘건물 밖으로 나가라(Get out of the building)’고 강조한다. 그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고객보다 똑똑할 순 없다. 고객을 안다고 자부하지만 수많은 고객 전부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스티브 잡스가 골방 안에 쳐박혀 불현듯 번개같은 영감이 떠올라 걸작을 완성했다는 건 다 지어낸 헛소리다. 잡스는 다양한 분야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이런 게 진정한 르네상스 맨 기질이다.”

서재에 있는 책꽂이

서재에 있는 책꽂이

– 미국에서도 유독 실리콘 밸리가 혁신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

“독특한 문화 때문이다. 뉴욕이나 보스턴 같은 동부는 부모가 가까운 곳에 있어 자주 찾아가야 하는 등 보수적인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다. 반면, 스탠포드대를 가느라 서부로 온 젊은이들은 대개 부모와 멀리 있어 간섭을 덜 받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  모험이 많은 생활, 그게 혁신을 가능케 했다.

많은 대기업이 차고에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몇몇 젊은이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혁신에 느린 건 전통을 고집하고 모험을 기피하는 문화 때문이다. 투자가들이 기업을 평가할 때 쓰는 주요실적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s)는 어떻게 사업을 실행(execute)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런 숫자는 아웃소싱을 한다든가 단기 프로젝트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상향 조정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실행을 위한 정책과 과정이다. 기업이 혁신을 한다고 치자. 실행 지표에는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나. 그런 게 혁신을 저해한다. 이런 지표들이 혁신을 못하게 정책적으로 막는 셈이다.

창의성을 다룰 땐 정확히 누가 성공할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혁신을 이룬 그룹들에는 항상 내부 문화를 역행한 사람들이 있다. 혁신을 위한 지표가 필요하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가 아니라 혁신이 목표라면  국가적으로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영화 제작사가 돈을 대고 분위기만 조성해 주고 모든 걸 지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리콘밸리에서 실패는 곧 경험이라고 말한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9~10번 실패하면 그땐 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웃음) 1~2번 실패한 이력은 개의치 않는 문화가 분명 있다.

나 역시 차린 회사가 망해 3500만달러를 날린 적이 있다. 그리고 다음에 1200만달러를 모아 투자자들에게 수억달러를 남겨줬다. 회사가 망하자 친구가 물은 적이 있다. ‘그래 다음 번엔 어떤 회사를 차릴건가?’라고.”

(이 대목에서 블랭크는 “북한은 한 경기 지면 다 탄광으로 보낸다고 하던데”라면서 웃었다. 북한에 대해서 역시 잘 모르고 있었다.)

블랭크 별장 정문.

블랭크 별장 정문.

– 하지만 그동안 성공한 실적이 없는 젊은이에게 사업 아이디어만 좋다고 투자하면 위험하지 않나.

“위험을 그냥 감수하는 거다. 실리콘 밸리엔 실패한 창업자를 부르는 말이 있다. 바로 ‘경험 있는 (experienced) 창업자’다. MIT가 있는 보스턴이 아닌 실리콘밸리가 혁신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거다. 1970년대 보스턴의 벤처캐피털이 은행 같았다면 서부 벤처캐피탈은 도박사 같았다. 동부 투자자가 확실히 결과가 보장되는 프로젝트를 원했다면, 서부에선 포트폴리오가 너무 좋은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투자한 10가지 중 9가지가 실패로 돌아가도 1가지만 성공하면 된 다는 모험가적인 문화가 있다.”

– 실리콘밸리의 혁신적인 문화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실리콘밸리엔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 문화란 게 있다.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받고 도와주는 것을 사회적 책무라 생각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반도체산업이 태동할 때 실패를 경험하는 기업이 허다했다.

그 때 페어차일드를 비롯 60여개 기업 엔지니어들이 같이 점심을 먹으며 자신들 경험과 시행착오, 노하우를 나누는 문화가 생겼다. 인도, 중국, 러시아 출신 등 인종적 장벽을 경험한 기업인들도 연합을 결성해 서로 돕기 시작했다. 그 문화가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졌다. 몇몇 기업 간부들이 1주일에 한 시간씩 시간을 내 엔지니어들을 만나 조언을 주기도 했는데, 장발의 20대 청년이 당시 55세였던 인텔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 연락처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조언이 필요하다고 면담을 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젊은이가 스티브 잡스였다.

지식은 유전을 통해 자동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실리콘 밸리는 그런 의미에서 학교였다. 우리는 페이 잇 포워드 문화를 가르쳐야 한다. 다음 세대가 배울 수 있도록.”

블랭크 별장 지하. 오래된 IT 기기를 수집해놓고 있다.

블랭크 별장 지하. 오래된 IT 기기를 수집해놓고 있다.

– 한국 창업자들이 외부 접촉을 삼가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런 현상은 비판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어떤 아이디어든 결코 사회적 분위기와 주변 도움 없이 성공할 수 없다. 오만해져선 안 된다.”

– 뛰어난  창업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격이나 자질이 있나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이다. 뛰어난 화가나 음악가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은 창업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작곡가와 연주자가 있다고 친다면 그들은 작곡가에 가깝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새로운 걸 시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가 창조됐을 때 어떨 지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예술 감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유익하다고 하지만 그걸로 커리어를 개발하고 돈을 벌 수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 벌 수 있다.

스타벅스 이전엔 커피가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 안 했다. 훌륭한 창업 아이디어들도 처음엔 우습게 보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런 자질은 작은 가게로부터 큰 기업까지 혁신하는 데 필요하다. 애플 아이폰이 나왔을 때 노키아 임원이 ‘그래서 이게 마켓 쉐어가 얼마나 되는데’라며 콧방귀 뀌었다는 일화가 있다. 몇십억달러 매출을 내는 대기업 CEO들 눈에는 훌륭한 아이디어들도 장난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혁신이 시작되는 단초다.”

– 대학을 한 학기만에 그만뒀는데 당신 생각은 상당히 과학적이다.

“친구들이 다 사업가로서 나를 바라볼 때 미소를 짓는다. 왜냐면 나는 ‘일단 저지르고 보자 걱정은 나중에 하고’식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대학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 두었고 비행기 정비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패턴 인식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계 일부가 패턴에 맞지 않을 때 잘 알아채서 고장 원인을 잘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엔 왜 어떤 회사는 성공하고 어떤 회사는 실패했는지 분석하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또 열정적이고, 생각을 빠르게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고 자부한다. 아들들에게도 고교 졸업 시 대학, 휴식, 또는 군대라는 세가지 옵션 중 자유롭게 선택하게 했다. 다행히 둘 다 대학을 갔다(웃음).”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상을 보고 왜 그런지 묻는다. 반면 어떤 이들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을 꿈꾸면서 왜 그게 안되는지 묻는다.”(Some men see things as they are and ask why. Others dream things that never were and ask why not.”) 찰스 다윈은 “가장 힘이 세거나 똑똑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생존하는 것이다. 이건 비즈니스 세계에도 마찬가지다”라고 강조했다.

블랭크가 ‘린스타트업’에 대해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s://hbr.org/2013/05/why-the-lean-start-up-changes-everything

그는 뉴욕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창업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창업 자체가 어려운 환경을 이기는 과정인데 이들은 이미 자라면서 그런 환경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창업자 중 50% 이상이 그렇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소음 속에서도 집중하는 능력이  남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런 멋진 곳을 보고 그냥 올 수 없어 쑥쓰럽지만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런 멋진 곳을 보고 그냥 올 수 없어 쑥쓰럽지만 기념사진을 찍었다.

 

폴 엘뤼아르와 김현, U2를 좋아하고 저널리즘에 대해 성찰하는 자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사회학자가 되려다 어쩌다 기자가 됐습니다.

2 Comments

  1. 퐁퐁

    2015년 2월 21일 at 12:26 오후

    실리콘 밸리.. 성공한 창업가.. 한국의 경직된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군..

  2. Pingback: GE는 왜 실리콘밸리를 배우기 시작했나 | 이곳에 살기 위하여 Pour vivre i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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