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이 위기라는 진단은 진부하다. 그 증상이 시작된 건 이미 오래전이기 때문이다.
1980년 1745개에 달하던 미국 내 신문 수는 1990년 1611개, 2000년 1480개, 2014년 1331개로 30년 동안 400여곳 이 문을 닫았다.
기자들은 펜을 놓아야 했다. 미국 언론사 기자 수는 1990년 5만6900명을 정점으로 2000년 5만6200명, 2010년 4만1500명, 2015년 3만2900명까지 25년만에 40%가 현장을 떠났다.
저널리즘이 위기인데 뭐 대수인가. 다른 전통 산업도 죽어가는 데가 한둘이 아닌데. 하지만 다른 차원이 있다.
건전한 저널리즘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필요한 정보 공급이 위축되고 이는 곧 민주주의 근간을 이루는 양식 있는 시민 육성에 차질을 부른다.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와 공동 운명체인 셈이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암시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지역 사회 곳곳에서 신문들이 토론과 연대를 공고히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는 행위 자체는 미국인들에게 <대규모 집단 행사(베네딕트 앤더슨)>이자 <아침 기도(헤겔)>였던 것이다.
전 세계 언론사에게 닥친 공통적인 지상 과제는 수익을 창출하라는 명령이다. 과거 안정적 수입원이던 광고 시장은 이미 인터넷 기업들이 장악한 상태. 이런 처지에서 막대한 운영비를 충당하며 뉴스를 꾸준히 생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면을 줄이고 기자를 해고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식으로 생존에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그런 마른 수건 쥐어짜기 방식은 해답이 아니라는 게 나와 있다.그렇다고 언론사가 일반 기업들 처럼 수익을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행태를 보일 수도 없는 일. 언론의 본래 사명을 생각하면 이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테제는 명확해진다. 우아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다.
저널리즘도 하나의 산업이란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뉴스라는 지적 생산물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사업이다. 그렇다면 이 상품에 대한 매력을 높여 더 많은 소비자들이 기사를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관건일 수 밖에 없다. 전처럼 만들면 대부분 팔려나가는 시대는 끝났다.
이젠 뭔가 질적으로 차별화된 뉴스 상품을 제조하지 않으면 저널리즘은 침몰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사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뉴스를 돈 받고 팔기 시작한 건 19세기 이후부터다. 그전에는 구전, 칙령, 전서문 등을 통해 무료 보급됐다. 그런데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더 빠르고 정확한 소식을 원하는 수요가 나오자 뉴스 전파가 산업 형태로 변신한 것이다.
새로운 저널리즘 활로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닌 해석과 의견을 담아 뉴스 내용을 차별화하라고 지적이 많다. [팩트가 전부지, 팩트야 말로 저널리즘의 시작과 끝이야]란 구세대 기자들 발상은 순진한(naive)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 뉴스를 소비하는 고객들은 멸균된 팩트를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언론이 지도와 나침반을 선물해주길 원한다.
뉴스를 무대 위에 올리는 <공연 저널리즘(Performed Journalism)>도 진행형이다. 미 샌프란시스코에 근거를 둔 비영리 시사 잡지 <머더 존스>는 2009년 이후 공연장을 빌려 기자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 영상과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매번 3000여명 유료 입장객이 몰릴 정도로 성공적이라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TED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셈인데 연사가 기자들이란 점이 다르다.
머더 존스 말고도 라디오랩과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 등 주로 라디오 매체들이 순회 공연을 통해 라이브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국에선 <나꼼수>가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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