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이 글은 2012년 6월 육군지에 기고한 것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첫 장면. 유해발굴 현장을 묘사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첫 장면. 유해발굴 현장을 묘사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423-7. 경기대학교 근처에 자리 잡은 국립보훈원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은 미망인 할머니 90여명이 살고 있다.

그 중 30여명은 유해를 찾지 못해 60년을 애끓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마지막 소원은 “남편 유해를 찾는 것”.
위패(位牌)만 덩그러니 놓인 국립현충원을 매년 방문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고 했다.

30여 년 전 이곳에 거처를 구한 윤재교 할머니는 18살이던 1937년 결혼했다. 남편은 안동 권씨 가문 양반가 자제. 결혼한 지 13년 만에 6·25전쟁이 터졌고, 남편은 경찰로 일하다 1953년
1월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도 행방을 모르다가 전사통지서 한 장이 덜렁 날아왔다. ‘1953년 3월 19일 ○○전투에서 전사’.

첫 휴가도 나오기 전에 불귀의 객이 된 셈이다. 윤 할머니는 이 전사통지서를 아직도 갖고 있다. 누렇게 바랜 통지서는 남편이 남긴 유물 2개 중 하나다.

윤 할머니는 “(남편이)경찰이라 혹시 경찰복 입고 있는 사진을 인민군이 보면 가족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사진을 모두 없앴다”고 말했다.

전쟁 후 집을 뒤지다 주민등록증에 붙은 조그만 증명사진을 하나 찾아, 전사통지서와 함께 보관하고 있다.

큰 딸이 철들기 전, 아버지가 죽은 줄 모른 채 감자알을 고르면서 “알 굵은 건 아버지 것”이라고 종알거릴 때마다 ‘ 혹시 살아있는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에 젖었다.

그러기를 45년. 윤 할머니는 2008년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유해발굴신청서에 이름을 써냈다. 윤 할머니는 “뼈라도 찾아야할 텐데”라며 “수만 목숨 앗아가놓고 북한은 또 왜 전쟁하려고 그러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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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할머니와 함께 보훈원에서 사는 김우현 할머니도 지난 2008년 유해발굴 신청을 했다. 살아있다면 남편은 89살. 1950년 피난 가다가 영천군 화산면에서 헌병에게 붙들려 입대했다.

1951년 4월 1일 7사단 8연대에 배치됐다고 부대장 이현진씨에게서 편지가 왔을 뿐, 그 뒤 소식이 완전 끊겼다. 아직 정식으로 전사, 실종통지서가 온 적도 없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아들 하나, 딸 하나이던 자녀들은 모두 어려서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김 할머니에게 얼마 남지 않는 생애 마지막 소원은 남편 유해를 찾아 정식으로 장사를 지내주는 것이다.

나용순 할머니는 방위장교이던 남편을 1950년 11월 잃었다. 결혼 8년만이다. 군인이라 바로 참전했고, 8사단 16연대에 배치 받아 “의정부인지 동두천인지 하는 사이에 있다”며 “부하들 데리고 가느라 정신이 없다”고 “아이들(3남매) 잘 길러 달라”는 편지가 마지막 안부였다.

나 할머니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후퇴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나 할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부산에서 통영으로 내려갔다.

남편 편지에 “통영 쪽으로 가라. 죽지 않으면 만날 수 있을 거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유해발굴을 신청했고, “남편 오른쪽 위 앞니를 금니로 해 넣었다는 말을 깜빡 잊었다”며 “국방부 발굴단에 좀 전해 달라”고 말했다.

나 할머니는 “남편이 참전하기 전 소뼈로 만든 노란색 머리빗을 달라고 해 들고 갔다”며 “혹 유품에서 이 머리빗이 나오면 남편이니 꼭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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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헌분 할머니는 1951년 7월쯤 남편에게서 편지가 한번 와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훈련 끝나면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받은 뒤 지금껏 연락이 없다. 4년 전 유해발굴을 신청했고, 어딘가 형체도 없이 묻혀있을지 모를 남편을 찾기 위해 유전자 검사용으로 딸에게 피를 뽑도록 했다.

해마다 6월이면 높은 분들이 이곳을 찾아 “꼭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지만 그 때 뿐이다. 

김선준 할아버지는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용산에서 하숙하며 배재학당을 다녔다. 그러다 전쟁이 터져서 참전했다. 

그때가 3학년 때(5년제). 대구까지 피난 갔다가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1ㆍ4후퇴 때 뒤로 밀려나면서 낙오됐던 사람들 모으고, 그러다 또 죽는 사람은 빼고 임시로 만들다시피 한 소대 30여명이 강원도 거진 건봉산에서 잠시 호를 파고 모여 숨어있었다. 그때가 11월쯤. 많이 추웠다. 한 15~20일 정도 그렇게 망보고 정찰하며 숨어있었다. 시계도 달력도 없어서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연락병인 ‘밥곰’(밥을 많이 먹는다는 뜻으로 지은 별명)이라는 후임이자 배재학당 후배와 잠깐 정찰하러 나갔다 온 뒤 물을 뜨러갔는데 그 사이 중공군이 포를 쏴서 소대원 전원이 몰사했다. ‘밥곰’도 그때 죽었다. 허겁지겁 가평 현리 명지산까지 도망쳤다.

전쟁 후 1년쯤에 ‘밥곰’의 전사를 알리러 집에 찾아갔는데 행방불명 통보가 와 있었다. ‘밥곰’ 어머니가 “이북 넘어간 거 아니냐”며 울길래 죽었다는 말도 못하고 “같이 군 생활한 전우인데 꼭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만 둘러대고 돌아왔다.

김씨는 “포격 맞아서 죽은 애들 모습이 자꾸 꿈속에 나와 몇십 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8년 전 유해발굴 접수를 해 계속 건봉산 일대를 뒤지고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비를 들여서라도 꼭 유해를 찾아 적당한 제사를 지내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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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갓 지난 김지순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기억이 없다. 태어난 지 보름쯤 됐을 때 아버지는 6·25전쟁에 징집됐다. 전쟁이 끝나도 소식이 없던 아버지는 6년 뒤 집으로 전사통지서가 오면서 생사가 확인됐다. 노란 봉투에 빨간색 글씨.

어머니가 글을 못 읽어 작은 이모에게 넘겼는데 이모가 잠시 머뭇거렸다. 어머니가 독촉하자 그제서야 “전사통지서”라며 아버지 유고를 알렸다. 그때 ‘아, 난 이제 아버지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재가를 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1983년 작고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라는 가망없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오래 살던 집도 이사 가지 않았다. 인천에 전상 유가족 아파트가 생겼을 때도 우선권이 있었지만 “언제 아버지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어찌 이사하냐, 안된다”고 해서 포기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행방을 알기 위해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집을 찾아다녔다. 그 중 한 무당이 “어머니가 95살에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버티던 어머니는 60살이 넘으면서 부쩍 힘들어했다. 죽기 전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였다.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가슴에 불덩어리가 올라온다”고 말하곤 했다.

김씨는 아버지 유해라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립묘지에 가 물으니 “손으로 쓴 위패만도 10톤 트럭 100대 분이다”며 “죽을 때까지 못 찾을 거다”는 대답만 듣고 돌아섰다.

그 뒤 우연히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어머니 이름과 집 주소를 알려주니 얼마 안가 연락이 왔다. 국립묘지 한 켠에 아버지 이름이 적힌 위패가 있었다.

김씨는 위패 앞에 엎드려 “당신 얼굴도 본 적 없고 안겨본 기억도 없다. 목소리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진짜 내 아버지라면 날 좀 도와 달라”고 말했다. 당시 김씨는 이혼에 암 수술까지 겹쳐 녹초가 됐던 상황. 1986년 7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보내고, 1989년에 위암 수술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이혼, 2005년엔 다시 유방암 수술…조국을 위해 아버지는 목숨을 바쳤지만 남겨진 그녀에게 조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혼 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왔다. 신기하게도 위패를 찾으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유족 지위를 인정받고 수당이 나왔다. 건강보험도 적용됐고, 임대주택을 1순위로 받으면서 고단한 삶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어머니를 국립묘지 아버지와 함께 위패로 모실
수 있게 된 점도 위안이다.

보훈청에서 재가하지 않고 떠난 미망인은 위패에 합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소식에 얼른 신청했다. 김씨는 “그렇게 의좋던 부부가 몇 년 함께 살지도 못하고 30여년 마음고생만 하다 가셨다”며 “이제라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됐으니 외롭지 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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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 외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60년 동안 기적 같은 생환 소식을 기다리던 김언연 할머니는 결국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2009년 12월 아들을 만나러 떠났다. 당시 105살이었다. 아들인 군번 333628 이갑송 일병은 육군 9사단 28연대 소속으로 대둔산이나 현리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병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13-3-065 위패로만 남아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10만 위가 넘는 주인 없는 위패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남북한 산하에 13만 명 전사자 유해가 가족들 품에 안기길 고대하며 묻혀 있다. 이들이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책무는 후대의 몫이다. 지금 누리는 축복이 그들에게 빚을 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폴 엘뤼아르와 김현, U2를 좋아하고 저널리즘에 대해 성찰하는 자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사회학자가 되려다 어쩌다 기자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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