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20년 : 일본에서 배우는 한국사회의 미래

“한국 기업들을 봅시다. 인재가 있고 자금이 있고 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위기가 반복되는 걸까요. 결국 경영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 대표적 경제지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서 30년간 경제 기자로 일하다 한국에 정착한 다마키 다다시(玉置直司) 법무법인 광장 고문이 내린 진단이다.(결국 이는 국내 대기업 총수 중심 체제 단점을 지적한 발언인데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얘길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만”이라면서 끊었다.)

그는 한국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기 성과에 집착해서 임원들을 함부로 내치는 풍토는 결국 기업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적이 조금 떨어졌다고 대규모 인원 감축을 하면 순간 좋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나중에 기업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다만 일본 기업들처럼 적자가 산처럼 쌓여가는데도 아무 조치를  안하는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부연설명했다.)

다다시 고문은 “IMF 이후 한국 기업들은 그때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툭하면 위기 경영, 긴축 조정을 강조하는데 너무 잦다보니 피로감만 쌓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면서 “10년 이후 기업이 어떻게 성장할까를 긴 호흡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을 돌아보면서 한국 사회에 던지는 교훈을 담은 책 ‘한국경제, 돈의 배반이 시작된다’를 펴냈다. (출판사에서 정한 책 제목이 맘에 안든다고 조용히 투덜댔는데 아마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로버트 기요사키가 3년전 펴낸 ‘앞으로 10년 돈의 배반이 시작된다’와 너무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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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다시 고문이 강조한 바는 이제 한국도 일본처럼 길고 긴 저성장의 터널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뉴노멀’시대에는 땅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주가도 마찬가지며, 임금도 상승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이 지녔던 착각을 소개하면서 한국인들도 이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정체는 일시적일꺼야 누군가 위기를 타개해주겠지(정부를 믿지마라), 좋은 상품만 만들면 팔리겠지, 우리 세대까진 괜찮겠지(지금 당장 위기가 눈앞에 있다), 고령화 사회는 먼 미래잖아(이미 고령화 사회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특별해(근거없는 낙관주의는 환멸을 낳을 뿐이다) 등이 대표적인 ‘착각’이라는 것이다. 착각 속에서 살다간 위기가 와도 눈치 채지 못해 치명적인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상당 시간 후폭풍을 겪었던 일본을 감안할 때 한국도 ‘부동산 뉴노멀’을 준비해야한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 중 하나다.

“가계 부채 1200조원인 나라에서 부동산 값이 계속 뛰는 건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부동산 거품 시대를 건너왔기 때문에 “부동산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릿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정확히는 집으로 돈 벌 생각은 안 한다는 것. 상업용 부동산은 다른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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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뉴노멀’ 시대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다시 고문은 “지출을 통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명품 소비 같은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나가면서 대비해야 한다는 것.(꼭 필요한 지출은 해야 한다. 쓸 데 없는 소비를 줄이라는 얘기다)

“고성장 시대는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까 궁리했지만 저성장 시대는 어떻게 하면 소비를 줄일까 하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는 “일본에선 식사 후 4~5명이 계산대에 모여 ‘오늘 밥값은 1인당 3672엔이 나왔으니 각자 내면 됩니다’는 ‘더치페이’가 관행”이라며 “ 한국도 어차피 고령화 사회로 가면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너도 나도 수입이 없는데 누가 누구껄 내줄 수 있겠는가)

다다시 고문은 굳이 분류하자면 친한(親韓)파에 가깝다. 연세대 어학당에서 배운 한국말도 유창하다.(교분을 쌓은 한국 내 각계각층 인사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헬조선’이란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한국이 ‘헬조선’이면 제가 와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여전히 한국사회엔 희망이 있다고 그는 믿는다.

“한국은 성공의 기준이 하나예요. 다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나와서 고시를 보거나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하죠. 그게 아니면 성공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어야 합니다. 일본도 도쿄대를 무조건 최고로 추앙하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각자 처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한국사회도 가치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려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스펙’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건 원래 기계에 붙이는 단어입니다.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을 기계처럼 취급해서야 되겠습니까.” (스펙인란 말 좀 고만 쓸 때가 됐다. 아무리 입에 붙은 유행어이지만 불쾌하다.)

그에게 가장 뇌리에 선명한 한국에서 기억은 1980년대 한국 체류 초창기 시절 일화다. 서울 청진동에서 점심을 먹은 뒤 돈을 내고 나왔는데 종업원이 헐레벌떡 뛰어나오더니 거스름돈을 놓고갔다고 전해주는 것. 이미 한참 걸어나와 횡단보도 앞까지 왔는데 그 여 종업원은 멀리까지 나와 “밥값이 700원인데 1000원 내셨다”면서 “300원을 챙겨가셔야 하는데 안 가져가셔서 이렇게 전해주러 왔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 뒤에도 이런 감동적인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라면서.)

다다시 고문은 이런 한국 서민들 도덕심과 성실성이 한국경제 기적을 이끌어낸 저력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엔 서민들이 생활고에 지쳐 빠르게 좌절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들 사기를 북돋울 뭔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 삶은 고단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때는 그나마 ‘열심히 하면 언젠간 잘 살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보여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은 미래가 절망으로 덮인 황무지란 인식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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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다다시 고문

폴 엘뤼아르와 김현, U2를 좋아하고 저널리즘에 대해 성찰하는 자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사회학자가 되려다 어쩌다 기자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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