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내가학교를졸업하고가진처음직장은미국감리교한국선교부였다.
그게1960년대의일이다.
미국인들과의생활은참으로생소한것이었고그들의문화에대한이해와그수용
에는생각보다시간이많이걸렸다.
같은크리스챤이었지만그들의신앙생활은그형식과내용에서우리와는많이
달랐다.
내게있어그건이해하기힘든일이었으며그러한그들의신앙생활을이해하는데도
정말많은시간과연구가필요했었다.
한가지예로,
그들은주일의11시예배에만참석했고그외어떤예배에도참석하지않았다.
그들에게는주일저녁의찬양예배도,수요일저녁의삼일예배도,구역예배(속회)는
물론새벽기도회도없었다.
이문제에대한내질문에대해그들의답변은뜻밖에아주간단했다.
그건모두가한국교회만이가지고있는한국적현상이라는것이었다.
즉자기들에게는그런종교문화는없다는설명이었다.
주일(主日)에예배드린다는성경적원칙은같지만기타예배의횟수는전혀한국만
의것이라는얘기였다.
말하자면외래종교가한국에서극단화한현상으로이해하고있었다.

그들의신앙생활은우리들에비해아주일상적이고현실적이었다.
성경을공부하는진지한자세,기독교적가치관의정립,이웃을사랑하는구체적인
행동들,정직한언행,겸손,관대한마음은정말일상적이었고배울점이많았다.
특히1960년대한국의열악한생활환경과조건에대해단한마디의불평도없이
자기들이하는일에최선을다하는전문성은돋보였다.
미국인크리스챤들과의생활을통해비로서내가깨달은것은그들의신앙생활이
형식과내용에서일상적인데비해우리들은교회안에서의생활과밖에서의일상이
분리된이중성을가지고있다는사실이었다.
그들은어려서부터이미뿌리내린기독교문화속에서성장한반면우리들은유교와
불교의영향속에서성장한이질감이극복되지못했고특히신학적으로그것을정리,
교인들에게교육하는기능이없었다.
제사문제가그중하나다.
이러한한국개신교신앙의이중성은지금까지계속되고있고급기야는기독교의
정체성에까지영향을주는수준에온것이다.
개신교가만난지금의위기가그것이다.

며칠전모언론이근자한국교회의새벽기도회에대해특집기사를실었다.
이기사의주요내용을발췌해보면,
우선새벽기도회에모이는회중이기천,기만에이르는대규모라는것이고,
특별새벽기도회-신년특별예배-에서는40일을빠지지않고출석한교인들에게
개근상으로성경을나누어주었고,
스타급목사들이인도하는새벽기도회는조용한기도에집중하기보다는찬양으로
뜨겁게달궈지는부흥회의분위기가더강하다는것이다.
한편새벽기도회에출석하고있는교인들의분포도30,40대가절반을넘고특히
젊은남자들이40%에육박하고있다는분석이다.
이러한교인분포의변화에대해새벽기도회를인도하고있는대형교회의한목사는
‘IMF사태이후,
한국인의삶의터전은크게달라졌다.
젊은이들은취업에서어려움을겪고,직장과가정모두에서감당하기어려운불안을
겪고있다.
직장에서는언제든해고될수있고,가정에서도자칫하면소외당하는것은물론,
심한경우이혼도당할수있다.
지난2년동안한국인의자살율이OECD국가중1위를기록할정도로심한위기감에
시달리고있다.는것이다.
말하자면여러측면에서조여오는불안이젊은층을새벽기도회로모이게하고있으며
한가정이함께출석하는이유도거기에있다는것이다.

‘새벽기도회’는,
한국적종교문화에서자연발생적으로이루어진신앙유형이며,
1906년평양장대현교회길선주,박치록에의해시작됐다.
특히교인이되기전도가(道家)수련을했던길선주는새벽수련이몸에밴사람이었다.
이새벽기도회가1907년대부흥운동에직접적으로연결된것을계기고평야이외의
지역에까지퍼지게되었다.
지금은교포들이있는해외의한국교회에서도새벽기도회가있다.
새벽기도회는,
신학적으로세가지기본요소로설명된다.
신비,고요,생기가그것이다.
인간에게있어새벽은신비한순간이다.
그래서동(東)이튼다고표현한다.
빛이시작되는순간인것이다.
일찍일어나그새벽을맞는마음은정갈하고순수하다.
그리고이런신비한정서를위해서는사위가고요해야한다.
시끄러운소음과잡음에서는신비가설자리가없다.
그물리적조건으로서의고요함은그래서절대적인조건이된다.
다음이생기,
새벽의그빛이트는순간을통해인간은새로운힘을받는다.
기(氣)는특히동양적인것이며그동양적종교정서가기독교의새벽기도회에
스며든것은자연스럽기까지하다.

그러나언론사가신문지면에실은커다란새벽기도회의사진을보면,
그새벽집회가신비,고요,생기와는무관한집체성(集體性)을가진쏠림현상임을
금방알수있다.
모두가일어서서두팔을위로뻗고절규하는모습들이다.
그것은불안과초조에대한카타르시스이며복을달라고소리지르는소란스러운
현장이다.
정말뜨겁게달구어진집단히스테리로보일수밖에없는현장이다.
지금도건전한교회는,
새벽기도회의예배순서는간단히끝내고조명을어둡게한후각자가조용히자기의
기도를드릴수있도록배려한다.
기도를마친사람도다른이들의기도에방해가되지않도록조용히일어나나간다.
그게새벽기도회의전통적이고올바른모습이다.
신비,고요.생기가살아있는예배인것이다.

결국,
자기개인의개인적인은밀한기도를드릴수없는사람들이새벽대형집회에참석,
집단에소속되어카타르시스를하는것이작금의대형새벽기도회라고정의할수
있다.
새벽기도회에개근상이란발상자체가이미비기독교적이고반기도적이다.
다른하나는무서운공적주의(功積主義)다.
새벽기도회에빠지지않고참석함으로서그출석율의누적이구원의조건이된다고
믿는,일종의미신이공적주의다.
주께서날카롭게공격한유대인들의잘못된믿음이바로그공적주의였다.
기도(祈禱)는,
그형식이어떠하든결국기도일뿐이다.
기도는영적존재인인간과하나님사이의영적인교통이다.
그래서기도는한인격과하나님사이에살아있는관계다.
그리고인간이기도를통해받는것은’돈’이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된마음으로자기에게기도하는자녀를사랑하시어여러가지’은사’를주신다.
그은사는한인격을변화시키고채워주시는힘이기때문에’능력’이되어나타난다.
더신실한사람이되는것,
매사를바르게처리하는분별력을가지는것,
이웃을배려하고염려하는’선한사람’이되게하시고,
빛과소금이되어사회에기여하게하신다.
말하자면기도의힘은기도하는인격이땅위에서하나님의나라를실현하는일꾼이
되게하는것이다.
그의성실한생활은부와명예와용기의보상을받게된다.
하나님이주시는복은그렇게이루어지는’은총’이다.
두팔을뻗쳐들고’내놓으라’고절규해서는결코얻을수없다.
한인격이하나님께드리는진실된기도로서만얻을수있다.
아무리거창해도인간의행사는행사일뿐예배가될수는없다.

우리가진정예수그리스도를믿는크리스챤이라면기도도주께서가르치신대로
드려야한다.
그말씀이배제된인간집단의소란스러운행사는크리스챤이할수있는행위는아니다.
‘기도할때에도위선자들처럼하지말아라.
그들은남에게보이려고회당이나한길모퉁이에서서기도하기를좋아한다.
나는분명히말한다.
그들은이미받을상을다받았다.
너는기도할때에골방에들어가문을닫고보이지않는네아버지께기도하여라.
그러면숨은일도보시는아버지께서다들어주실것이다.’마태6:5-6.공동.
기도에대한주의가르치심이이렇게분명한데왜그반대의현상이나타나기승을
부리는가.
예수를믿지않기때문이다.
자기식대로딴것을쫓아갔기때문에그렇게된것이다.
주의말씀이배제된모든행사는결코기독교적인것이될수없다.
그건기독교가아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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