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다볼(tabor)산은,
갈릴리지역나사렛남쪽에있으며여호수아서에의하면잇사갈,스블론,납달리
지파의경계가만나는곳이다.
공관복음에는예수께서이곳에서그모습이변했고엘리야와모세를만나는사건이
기록돼있다.
그래서우리는이곳을변화산(mountoftransfiguration)이라고부른다.

지금이산정상에는카톨릭성당과부속수도원이있다.
그리고수도원식당에서는로마에서도맛볼수없는최고의스파게티를먹을수있다.
나이많은신부님이직접만드는것이다.
나는이수도원수사(修士)의방에서하룻밤을묵은일이있다.
두평이채안되는그방에는인간에게가장기본적으로필요한것만있었다.
작은탁자와의자,
작고기능적인나무침대,작은옷장,작고깨끗한화장실,그게전부였다.
더줄일수있는것은아무것도없었다.
사찰에갔을때보게되는스님들의거처역시비슷하다.

수사(修士)들은,
종교적으로볼때그형식과내용에서최고수준의신앙생활을하는분들이다.
안으로가지고있는것은충만해도밖에서볼수있는’소유’는거의아무것도없다.
최고수준의신앙이소유와무관하다는것은종교,나아가서인간의신앙생활이
그근본에서어떠해야하는지를알게해주는중요한단서가된다.

인간에게있어종교,신앙은자발적인선택이다.
반드시선택이어야한다.
신앙은강요될수있는게아니기때문이다.
그리고그선택의근거는자기가선택하는종교의종교적내용이어야한다.
기독교의경우그근거는성경말씀이다.
선택은자발적이지만내용은이미신앙적이다.
그래서종교,신앙의선택을회심(回心),또는회개(悔改)라고한다.
본래의어휘는metanoia-전향(轉向)이다.
가던방향을180도바꾼것이기때문에’가치관의변화’라고도한다.
다이아먼드가돌로보이는변화가그것이다.

‘아무도두주인을섬길수없다.
한편을미워하고다른편을사랑하거나한편을존중하고다른편을업신여기게
된다.너희는하나님과재물을아울러섬길수없다.’마태6:24.공동.
여기서재물은mamona-mammon이다.
그것은소유를의미하는말이자죄악을가져오는것으로의부(富)이며
부정한재물을의미한다.
그래서mammoism은배금주의(拜金主義)가된다.
섬긴다는것은douleuein-serve로서노예가그주인에종속된상태를이르는말이다.
재물자체는선도악도아니지만인간이그것에종속되는정도가되면재물도인간도
악으로변한다는경고다.

하나님과재물을선택의대상으로좁혀말씀하신것은종속의절대성때문이다.
다른하나는하나님과재물은같이있을수없는비대칭성의것이기때문이기도하다.
두주인을섬길수없다는말씀이그뜻이다.
‘돈’은중립적이다.
선하게쓰면좋은것이고나쁘게쓰면악한것이된다.
그러나돈은우리의일상에서반드시필요한경제적수단이기도하다.
돈이없이는생활할수가없다.
돈은얼마나편리한것인가.
돈은그구매력으로사람들을매혹시키며,그래서돈에대한사람들의욕심은그
끝이없다고한다.

기독교신앙은,
주께서하신말씀그대로하나님과맘몬중하나를선택하는결단이다.
그것도스스로판단하고원해서하는선택이다.
자발적이지않으면메타노이아-전향이안되고가치관이바뀌지않는다.
주께서제자들에게가르치신기도-주기도문중’일용할양식’이라는말씀이바로
그대답이된다.
일용할양식은가장기본적인,최소한의물질이다.
크리스챤이소유하는물질-맘몬의양이어느순준이어야하는지를가늠하게해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가장바람직한크리스챤의물질관은어떤것일까.
하나님께서는사람에따라서로다른탈란트를주셨고어떤사람은다른사람들보다
더많은돈을가지고있는것도사실이다.
주께서말씀하신기준은물량(物量)이아니라종속성(從屬性)이다.
돈의주인인가.
돈의노예인가가기준인것이다.
돈-물질의노예라면그신분으로는하나님을섬기는하나님의종이될수는없다.
두주인은허용되지않기때문이다.
아무리돈이많아도그근본에서하나님의종이라면돈의주인이지노예는아니다.
문제의핵심이바로거기에있다.

신앙생활은,
성경말씀대로사는일상의삶이다.
우리의행함이부족하다해도최선을다해그렇게살아야한다.
그래서우리의부족을채워주시는분을보혜사성령이라고부른다.
우리가최선을다한다는것은무엇인가.
하나님을선택하는결단이다.
하나님을향해전향-메타노이아를하는것이다.
자기의최선을다해돈을벌되그것을선하게사용하는생활자체는하나도나쁠게
없다.
죄가되는것은,그돈에종속된노예가되는것이다.
크리스챤이돈을탐(貪)하면안되는이유가거기에있다.

사도바울은언제나우리들에게는신앙의사표(師表)다.
그가빌립보교인들에게토로한말씀을보자.
‘나는어떤처지에서도자족(自足)하는법을배웠읍니다.
비천하게살줄도알며풍족하게살줄도압니다.
배부르거나배고프거나넉넉하거나궁핍하거나그어떤경우에도적응할수있는
비결을알고있읍니다.
나에게능력을주시는분을힘입어나는무슨일이든지할수있읍니다.’
빌립보4:11-13.공동.
바울은세상형편-물질의세계에대해종속되지않은사람이며자유인이었다.
물질을섬기지않고도스스로만족할수있는그능력이하나님께로서왔다고고백
하고있다.
신앙의힘인것이다.

크리스챤이크리스챤이기때문에돈을멀리하는것은옳은태도가아니다.
열심히일해돈을벌고그돈으로더건전하고풍족한생활을할수있다면그건
하나도나쁜것이아니다.
그건하나님이주시는복이다.
오히려감사할일이다.
문제는크리스챤이면서하나님이아니라돈에종속되어돈의노예가되는것이다.
스스로돈에대해’주인’의자리를잃었기때문이다.
돈을섬기는사람은하나님을섬길수없다.
그신앙적관계가끊어졌기때문이다.

많은돈을가지고그돈의’주인’이되기는아주어렵다.
낙타가바늘귀를지나는것보다더어렵다는말씀이그뜻이다.
일확천금이위험한것도같은이치다.
바울사도는신앙의아들인디모데에게경고했다.
‘돈을사랑함이일만악의뿌리가된다.’딤전6:10.개역.
현대는경제가정치를앞서는시대다.
돈이없으면인간이그인격을상실할수도있는세대이기도하다.
이제mammonism-배금주의는금송아지가되어교회의강단을차지했다.
축복과축원이남발되고아멘이탐욕스러운화답이되어교회천정을울리고있다.
물량주의(物量主義)에잠식된교회는이미그리스도의에클레시아는아니다.

보통사람인우리가수사(修士)의방에서살수는없다.
그렇다고진시황제의아방궁(阿房宮)에살아도안된다.
그균형을잡아주는것이무엇일까.
우리주님의말씀밖에없다.
‘두주인을섬길수없다.’
그래서신앙은자발적인선택이다.
‘누구든지예수께서하나님의아들이라는사실을인정하면하나님께서그사람안에
계시고그사람도하나님안에계십니다.’요한1서4:15.공동.
그안에하나님이계신것이곧신앙이다.
그신앙이균형을잡게해주는것이다.
바울사도는그것을하나님이주시는’능력’이라고표현했다.

우리들의자발적인선택은,
매일,매순간,어떤결단을요구하고있다.
일상안에믿음이있어야하는이유가그것이다.
올바른선택을하는것도,잘못된선택을하는것도바로우리들이다.
때문에신앙적선택은그만큼중요하다.
두주인을섬기려고하는사람들에겐더욱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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