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남용- 宣敎濫用.
濫用은함부로마구쓴다는뜻이다.

증인은어떤사실에대해그것을구체적으로증언하는사람이다.
특히법정에서특정사건에대해증언하는사람을일컽는다.
이때그증인의증언은법정판결에서거의결정적인요소가될수있다.
때문에동서고금을통해위증(거짓증언)은엄하게다스린다.
위증죄가바로그것이다.

우리가흔히영화에서보게되는FBI의증인보호프로그램은증인의중요성을잘
알게해준다.
조직범죄의공소를유지하고배심원들로부터유죄평결을끌어내기위해검찰측이
증인을세우는경우보복을피하기위해증언이끝난증인의얼굴을성형수술하고
새이름,주소.직업까지준비,증인을보호하고있다.
아예딴사람을만드는것이다.
증인의역할은그렇게중요한것이며그증언에따라선,악이분별되고사람의
생사가갈린다.
한인간이어떤일에대해증인이된다는것은결코간단한문제가아니다.
신중에신중을기하는이유가거기에있다.

‘너희는이모든일에증인이다.
나는내아버지께서약속하신것을너희에게보내주겠다.
그러니너희는위에서오는능력을받을때까지예루살렘에머물러있거라.’
누가복음24:49.공동.

‘그러나성령이너희에게오시면너희는힘을받아예루살렘과온유다와사마리아
뿐아니라땅끝에이르기까지어디에서나나의증인이될것이다.’
사도행전1:8.공동.

누가가기록한말씀은이모든일,말하자면모두가겪어알고있는십자가사건의
‘증인’이바로그들이라는것이며사도행전의말씀은너희가나의’증인’이라는
뜻이다.
누가는자기가기록한복음과사도행전(1:4)에서똑같이’증인’이되는조건으로
성령의오심을강조하고있다.
십자가와그리스도를증언하는증인이되기위해서는반드시성령을받아야한다는
주문이다.
이는예수에대한증인이된다는것은그것이신앙적-믿음의세계이기때문에
인간이가진기능과역할만으로는불가능하기때문이다.
성령의도우심이필요한이유다.

본문에쓰이고있는증인은,
marturos다.
여기에서파생된영어가martyr,
일차적인뜻이’순교자’다.
순교-殉敎가무엇인가.
자기의신앙,종교를위해목숨을바치는일이다.
일반적인의미에서법정증인과는그차원을달리하는깊은뜻을가진다.
marturos는그외에도’목격자’라는의미가있다.
자기눈으로본것,자기가체험한것을증언하는살아있는증인을뜻한다.
그만큼그증거하는양식(樣式)이결정적이고치열할수밖에없다.

증인(證人)이되기위한조건은세가지다.
그첫째가직접적인체험이다.
바울이순교로서그리스도예수를증거하는증인이된것은다마스커스에서의체험
때문이다.
그건바울자신도어떻게할수없는,거역할수없는섭리의세계다.
그체험이없었다면사울이바울이되지도않았을것이다.
그는예수의증인이되기위해로마시민권을가진유대인으로서이미가지고있던
모든기득권을포기했다.
배설물처럼버린다고했다.

다음이그체험에근거하는분명한자기확신이다.
바울이초지일관주장한자기확신은예수가그리스도라는믿음이다.
그가그토록그리스도에대한지식을강조한것은자기가그리스도에대해가지고
있는확신이있었기때문이다.
그다음이증거다.
증인이일상을통해자기확신을다른이들에게알리는것이다.
그증거의방법은시대와문화에따라다르지만내용은변하지않는다.

일반적인의미에서지금은그것을’선교’라고부르지만이단어의남용과오용,
왜곡이너무심하기때문에증거의의미로쓰기에는매우부적절한단어가되고
말았다.
교회의부속유치원에서영어까지가르치면서그것을’선교원’이라고부르는
정도다.
그것은그대로쏠림현상이되어너도나도무분별하게모든일에선교라는단어를
오용,남용하고있다.
말-언어는계속잘못쓰면그본래의의미를잃어버린다.

‘너희가이일에대해증인이다.’
‘너희가세상에대해내증인이다.’
우리들이그리스도의증인이기때문에붙여진이름이크리스티아누스다.
크리스챤의어원이며’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사람.’이라는의미다.
자기들고장에나타난,
이상하긴한데뭔가다른사람들,
전혀해가안되는성실한사람들을그들은그렇게부르기시작했다.
그게안디옥에서의일이다.
크리스티아누스,
그리스도라하는예수를따르는사람들은어떻게살아야되는가.
우선예수의마음을닮아야한다.
‘주예수내맘에들어와계신후변하여새사람되고.’가그것이다.
예수를영접한다는것은결코어려운얘기가아니다.
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가되는것이다.
그어떤것도이보다더절실하지는않다.
진정한의미의크리스챤이라면우선그의마음을닮아야한다.

그러기위해서는그분의가르치심을배워야한다.
그분이주신말씀을공부해야한다.
그게곧,신앙내용-믿음의내용이된다.
이게없으면겉으로는기독교교인이지만속은무당이된다.
전혀딴것이되고만다.
그래서,
딴것이안되기위해,구원받기위해,바른신앙생활하기위해성경을읽고공부
해야한다.
성경을’덮어놓고’믿는믿음은그래서가짜가.

마지막으로,
그믿음은일상안에서살아있어야한다.
예배당문이경계가되어그안과밖이다르다면그건죽은믿음이다.
그건기독교가아니다.
이름과겉모습은기독교로보이지만절대로기독교가아니다.
일상에없는것은모두거짓이다.
지금의한국교회가이혼탁한세상에서빛과소금의기능을상실한가장결정적인
원인이거기에있다.
거짓에무슨힘이있겠는가.

땅끝까지이르러’증인’이되는것이’선교’다.
그러나,
선교는그나름대로상당한수준의분석과준비,실행을요구한다.
아무때나,아무곳이나가서하는게선교는아니다.
지역적특성,주민들의문화,전통종교,기독교에대한인식과반응,투자대효율,
적임자의선발과사전훈련은필수적이다.
특히현지언어와풍습에대해공부해야한다.
언어는,소통을위해서는현지인처럼구사할수있어야소임을다할수있다.
여기에덧붙여생각해야하는것이창구의일원화다.
개교회는지원을,선교사의훈련과파송,관리는’교단’이해야한다.
중복,낭비,내분,비난,역효과를막을수있는길이그방법이다.
선교의효율을높이기위해서도당연히그래야한다.

한국개신교의고질병중하나가개교회의선교사파송이다.
지금전세계160여개나라에1만2천여명이나가있다.
미국의4만6천에이어세계두번째다.
선교받은지100여년만에일어난일이다.
정말이극성은세계에따를자가없다.

왜한국의개신교교회들은개별적으로선교사를파송하고있는가.
교세확장과공명심,그리고소영웅주의가주된이유다.
여기에위험지역도마다하지않는이상한경쟁심리까지가세돼있다.
물량으로커지려는교회들의속성은선교사의파송으로그욕구를충족시키고
있다.
선교지까지연결된선(線)은바로자기교회의크기인것이다.
예배당벽면에대형세계지도를붙여놓고선교지를표시해나가는’정복’은
눈으로볼수있는교세의확장이아니겠는가.
목회성공주의는여기에더해,그식민지에온갖명목으로교인들을내보내는
이벤트를통해사람들을자기교회에묶어두려고한다.
이래서선교는mammonism(물량주의)의수단이된지오래다.
이름은선교지만내용은딴것이다.
그리고점점더그렇게나가고있다.
지금브레이크를걸지않으면어떤일을만나게될지예측하기도어렵다.

선교는증인이된다는뜻이다.
marturos는’순교자’다.
죽기를각오하는증인이아니면안된다.
예수그리스도를전한다는것은그런것이다.
그건체험과자기확신없이하나의이벤트로떠날수있는사안이아니다.
함부로’선교’라는말을쓰면안된다.
여행이면여행,여름방학을이용한봉사면봉사,놀러가는것이면그냥놀러가는것
이어야한다.
그건하나도나쁜게아니다.
나쁜것은,사악한것은그런일들에’선교’라는명분을달아스스로를속이는것이다.
개교회의물량화를위해선교를악용하는것은분명히죄가된다.

한국개신교의진정한위기는,
아무도이잘못에대해깨달음이없고시정하려는노력이없는점이다.
모두가똑같이,같은방법으로경쟁하고있기때문이다.
‘안에서새는바가지밖에서도샌다’
정말속담틀린데하나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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