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a dolorosa.
금식(禁食)은음식을먹지못하는것이다.
대표적인것이종교의"계율’때문이다.
유대인들의’안식일’과무슬림들의’라마단’이그것이다.
형식적인측면이있는것은사실이지만그형식을통해내용을담는다는목적이있기
때문에수천년동안지켜져내려오는신앙적전통이기도하다.
다른하나는환자에게일정기간치료를위해음식물을먹지못하게하는금식이있다.
지금은링거주사로탈수현상을막을수있기때문에환자가고통을느끼지않고도금식
할수있다.
여기에비해음식을먹지않는다는행위는같아도그목적에서전혀다른금식이있다.
어떤요구의관철을위한단식(斷食)이그것이다.
삭발과함께자주사용되는,대단히극단적이며정치적인행동이기도하다.
금식이계율이라는타의적인의미가있다면단식은자발적이고적극적이다.
금식은영적이며육체적인치유의측면이크지만단식은목적지향적인극단의행동
이라고할수있다.

거의모든동물들은하루종일먹을것을찾는일과배설로대부분의시간을보낸다.
영장류에가까운유인원인침팬지,고릴라,오랑우탕이라해도예외는아니다.
동물에게는금식,단식의의지적인기능이없는것이다.
스스로먹기를거부하는행위는실로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인간만의것이다.
치료를위한금식을제외하면종교적이거나정치적단식은고도의영적이며정신적인
행위이기도하다.
금식기도나단식농성은인간이가지고있는영적,정신적능력이밖으로나타나는
특별한기능이기도하다.
특히종교적인금식은영적존재인인간이자발적으로자기를성찰하는신비한시간
이기까지하다.

마태복음4:1-11절에는요한으로부터세례를받은예수가광야에서40일을금식한후
유혹자로부터시험받는내용이있다.
아마도예수의어록이근거가되는이기사는마태뿐아니라마가와누가도채택하고있다.
마가의같은내용을차입한마태는누가에비해더정교한구조로이를편집했으며
누가와는두번째와세번째유혹의순서가바뀌어있다.
복음서의이’시험받는’기사는세례시하나님의아들임을인정받은예수가광야에서의
유혹자의시험을이김으로서그신분을입증하는종교적목적을위해기록했다고볼수
있다.

우선눈길을끄는것이통상적이지않은금식기간이다.
전통적인유대교-유대인의금식은낮동안만금식하고밤에는음식을먹었다.
그러나본문에서는예수가40일을금식했다는점을아주분명하게밝히고있다.
40일간의금식은보통사람으로는거의불가능한기간이다.
이특별금식이상징하는것은모세의40일금식과의연계때문이다.
모세는하나님으로부터율법을받을때40주야를금식했다.
초기의교회가예수와모세를같은반열에서게하는노력은변화산기사에서도그대로
나타난다.
모세가이스라엘의옛지도자라면예수는새시대의메시아인것이다.

‘배고픈게끝이다’라는말이있다.
사흘굶으면못하는짓이없는게인간이다.
굶주린다는것,배고프다는것은그렇게심각한타격이다.
이제40일을주린사람에게유혹자가나타나가장절실한말로유혹한다.
‘네가만일하나님의아들이라면이돌더러빵이되게하라.’
굶주린예수에게이보다더매혹적인제안은없을것이다.
하나님의아들에게그건어려운일이아니다.
이때의예수의대답은성경의인용이다.
‘사람이빵으로만사는것이아니라하나님의입에서나오는모든말씀으로살리라’
본문이이단락에서전하고자하는내용은오직한가지다.
예수는빵때문에오신분이아니라는선언이다.
빵은인간이해결해야할문제다.
그것은동시에육체의문제다.
예수가오신것은’하나님의말씀’때문이다.
그건인간의본질에대한근원적인문제이기도하다.
예수는인간들의본질적인문제의해결을위해오신분이다.
그가굶주림때문에돌로빵이되게한다면그사명을저버리는것이된다.
‘하나님의아들’이아닌다른존재가되는것이다.

두번째유혹은실로교묘하다.
성전꼭대기에예수를세운유혹자는성경말씀으로그를유혹한다.
시편91편의말씀이다.
‘네가뛰어내려도하나님의천사들이손으로너를받들어네발이돌에부딪히지않게
하실것이다.’가그것이다.
하나님이그백성이스라엘에게하신약속이니반드시지킬것이다.
그러니뛰어내려도결코다치지않을것이다.
성경말씀을그본래의의도와는전혀다른목적으로악용하는대표적인사례가이런
경우다.
인간의인간적인의도와목적때문에성경말씀을왜곡하는죄악은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에대해예수는신명기6장의말씀으로맞선다.
‘주너희하나님을시험하지말라.’
하나님의말씀을인간의이기적인목적으로사용하는것이그분을시험하는것이다.
죄의질(質)에서아주사악한것이그것이다.

세번째유혹은’아주높은산’에서시작된다.
성서에서산은중요한신학적의미를가진다.
산은예수의정체성(正體性)이드러나는장소다.
산에서말씀하셨고,산에서변화하셨고,부활후제자들을만난곳도산이다.
이제’천하만국과그영광’을볼수있는위치에서게된것이다.
인간이추구하는부와명예가다있는최고의조건을보여준것이다.
그모든것을주는조건은한가지다.
‘내게절하면모든것을주겠다.’
여기에서천하만국은하나님을떠난세상을의미한다.
유대인의입장에서는자기들을정치적으로억압하는이방세계의힘과영광인것이다.
유혹자의요구는하나님을버리고자기를섬기라는것이다.
그러면그모든것을주겠다는제안이다.
예수는다시신명기6장의말씀을인용한다.
‘사탄아물러가라.
주너희하나님께경배하고다만그를섬기라.’
사탄은히브리어로’적대자’다.
하나님을,하나님의뜻을거스리는적대자가사탄이다.
세상의것을얻기위해사탄에게절한다는것은하나님을떠나우상에게로가는것을
뜻한다.

세가지시험-유혹에대한기사는,
그배치에서공생애부분에앞서있다.
의도적인이배치는’예수’가누구인지를분명히밝히려는의지가담겨있다.
빵에대한유혹도,
하나님의능력을시험해보고싶은유혹도,
부귀와영화때문에하나님을떠날수있는유혹도그를이길수가없었다.
보편적인인간이넘기어려운유혹을물리칠수있는’능력’이증명된것이다.
빵,요구된기적,우상숭배는인간이거절하기어려운대상들이다.
이것들을거절하기위해서는고통스러운대가를기꺼이치르겠다는결단과신념이
필요하다.
그러나지금교회안에는물질과거짓기적과우상으로가득차있다.
하나님의자리가다른것으로대체되고그리스도없는교회로변질되고있다.

교회는그본질에서예수가거절한이세가지유혹을거절할수있어야교회다.
똑같이이세가지를거절할수있어야크리스챤이다.
왜이세가지를거절해야하는가.
그건하나님을떠난,하나님과적대하는세상의것이기때문이다.
신앙이결단과선택인이유가그것이다.
빵을먹는것과빵을섬기는것은전혀다른문제다.
빵을섬기는자가어찌동시에하나님을섬길수있겠는가.

예루살렘구시가지에는viadolorosa라고불리는좁고복잡한,돌이깔린옛길이
있다.
좁은길의양쪽에는아랍인들의가게들이다닥다닥붙어있고수많은순례자들이
이길을따라성묘교회로간다.
왜그길의이름이’슬픔의길’인가.
예수가십자가를지고갔던고통의길이기때문이다.
예수가그무거운형틀을지고고통의길을간것은’세상의요구’를거절했기때문
이다.
만약그가십자가처형으로완전히사라졌다면지금기독교는없다.
그러나그가처형된지2000여년이지난지금지구상에는수십억의크리스챤들이
viadolorosa를따라가고있다.
세상은그를유혹할수도,정복할수도없었다.
예수를직접체험한첫세대의크리스챤들이그분을’하나님의아들’로고백한이유도
거기에있다.

사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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