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번의 용서.
죄(罪)란무엇일까.
누가나다알고있는이단어에대해쉽게설명할수있는사람은많지않다.
알긴아는것같은데핵심을찔러설명하려고하면잘되지않는다.
선(善)과악(惡)이신비라면,죄(罪)도신비한정서다.
그래서설명하기가어려운것이다.
죄는언제나악과동반한다.
죄악(罪惡)이그것이다.
악은죄이고죄는악이다.
이세상에죄가전혀없는사람은아무도없다.
‘의인은없나니하나도없다.’로마서3장에있는말씀이다.
기독교에서말하는원죄(原罪)는인간안에있는죄의성향에대한가장보편적인
설명이다.
인간안에는동전의양면처럼선과악이함께있다.

크게나누면죄는두가지다.
그하나가실정법(實定法)을어기는행위다.
한국가의입법기관이현실적으로제정,정립한법을어기는일이다.
범법행위라고도한다.
이러한범죄는국가공공기관에의해체포,조사,기소,판결을통해응분의벌을받게
된다.
즉범법행위의객관적인증거들에의해실형을선고받고교도소에수감된다.
죄에대해벌(罰)을받는것이다.

다른하나의죄는도덕적인것이다.
실정법을어긴것은아니지만스스로의양심에찔리는,도의에서벗어나는죄가그것이다.
종교에서말하는죄도여기에해당된다.
따라서종교에서규정하는죄가실정법에서는죄가아닐수있으며실정법에서죄가
되는행위가종교에서는죄가아닐수도있다.
살인은실정법과종교적으로죄가되지만남을미워하는마음은실정법상의죄는아니다.
그러나종교적으로는죄다.
‘피레네산맥남쪽에서의악은그북쪽에서는선이될수있다.’
오래된서양의격언이다.
예를들어안중근은우리에게는의사(義士)지만일본에서는죄인이다.
죄인에대한이상대성은국가에따라정반대의것이된다.
관습법도마찬가지다.
옛에스키모의관습은여행중인남자가자기이글루에머물게되면아내를제공했다.
이를거절한백인선교사가친절(관습법)을거절한죄로살해당한일이있었다.

그렇다면성경이정의하는죄는어떤것인가.
물론유대인사회에서는’율법’이라는만고불변의규칙이있고그것을어기면죄가된다.
그러나신약의세계는다르다.
신약에서의죄는하말티아-hamartia다.
직접적인뜻은’과녁을맞추지못했다.’이다.
시위를떠난화살이목표를빗나간것이다.
그의미는,
인간이하나님의뜻에서이탈한것이다.
그게성경이정의하는죄다.
하말티아는,사악한행동(실정법)뿐아니라사악한마음-생각까지도죄로규정한다.
말하자면나쁜짓을하려는인간의성향을총체적으로가리키는말이그것이다.
에덴에서아담과이브는하나님의길로가지않고자기자신들의길로갔다.
그어긋남,일탈을윈죄(原罪)라고부르는것이다.
모든인간이그속에감추고있는악,그성향이본래의죄다.
여기에서예외인인간은없다.
가장적극적인기독교적표현은,
죄란,피조물이창조주의거룩한성품을나타내지않거나위반하는것이다.
말하자면죄가죄로정의되는뿌리가창조주에게있다는뜻이다.
이는기독교신학의근간이기도하다.

마태복음18:21-22절은,
마태에만있는단락으로’용서’가그주제다.
용서는죄가전제된행위다.
이단락은죄의문제에대한대단히구체적이고파격적인내용을담고있다.
마가와누가에는없는독특한부분이기도하다.
전통적으로유대의관습은자기에게잘못을저지른죄인에대해가장관대한조치가
세번까지용서하는것이다.
그런데본문에서베드로는7번을제시한다.
유대인인베드로로서는자기들의관습을크게상회하는기회를제시한것이다.
한편으로7은완전수이기도하다.
그러나이질문에대한예수의답변은놀라운것이다.
‘일곱번씩일흔번이라도용서하라.’
그뜻은제한없이,끝없이용서하라는것이다.
아직까지어떤유대인도들어보지못한,거의혁명적인말씀이다.
예수의이놀라운말씀은충분히오해의소지가있다.
제한없는용서는죄자체를부인하는것이아닌가.
죄는벌을받는것이당연하다.
그런데7번씩일흔번이라도,즉490번이라도용서하라는것은벌을무력화하는,
그래서죄가성립되지못하는어긋남이아닌가.

용서는정죄(定罪)가전제된다.
정죄는죄가있다고판정하는것이다.
말하자면유죄판결을한것이다.
우리가예수의이말씀을제대로깨닫기위해서는용서의전제가되는정죄의개념에
대해분명하게알아야된다.
실정법은정해진법을어긴객관적증거에의해정죄하고처벌한다.
그건개인들의사사로운일이아니다.
그러나본문에서내형제는이웃을의미한다.
실정법의개입이있기전의상태이거나실정법과무관한것일수도있다.
이때의정죄는,
인간이인간을향해죄가있다고판정하는것이다.
예수의끝없는용서는이대목에서인간의정죄를배제하는것이다.
인간을죄있다고판정하시는분은오직하나님한분이라는뜻이다.
따라서하나님이이미용서하신사람을다시사람이정죄하는잘못이생기는것이다.
때문에정도의차이가있을뿐모든인간은똑같이하나님앞에서죄인이라는깊은
뜻이그말씀안에있다.

‘친애하는여러분,
여러분자신이복수할생각을하지말고하나님의진노에맡기십시요.
성서에도(신명기32:35)원수갚는것은내가할일이니내가갚아주겠다하신
주님의말씀이있읍니다.’로마서12:19-21.
이말씀을통해확실하게알수있는것은,
끝없는용서가죄를없애는것이아니라하나님앞에서그벌을받게하는,오히려
더무서운일이라는사실이다.
‘그머리에숯불을쌓아놓는셈’이라고표현한게그것이다.

그렇다면성경이말씀하는’용서’란무엇인가.
afesis-해방이다.
족쇄에서풀어주는것,자유롭게해주는것이다.
다음이’탕감’이다.
빚진것을없애주는것이다.
잘못이나죄를꾸짖거나벌하지않고끝내는것이용서다.
왜우리들은끝없이,7번씩일흔번이라도형제를용서해야하는가.
우리모두는,하나님앞에서는같은죄인이기때문이다.
주께서하신놀라운말씀의뜻이그것이다.
인간은인간을정죄할수가없다.
그건하나님이하시는일이다.
하나님께서정죄하시고벌을주시는것을믿는것이곧’신앙’이다.
우리가신실한신앙생활을한다면,하나님을믿는신앙생활을한다면그어떤
형제의죄라하더라도내가정죄해서는안된다.
용서만하면된다.
그를정죄하고벌하시는분은오직하나님이시기때문이다.

우리모두는형제를정죄하려는,정죄하고싶은아주큰유혹을받는다.
소문을만들고,
그걸부풀리고,또더부풀려서다른사람에게말하고,그소문은눈덩이처럼커져서
형제의가슴에못을박는다.
악플에시달리다목숨을끊는게작금의일이다.
겉으로는신앙생활을하면서그마음속은밀한곳에서형제를정죄하고있다면
자기가하나님이라는얘기다.
이보다더무서운죄는달리없다.
7번씩일흔번이라도용서하라는말씀은형제를정죄하지말라는말씀이다.
‘너희가남의잘못을용서하면하늘에계신아버지께서도너희죄를용서하실것이다.
그러나너희가남의잘못을용서하지않으면아버지께서도너희의잘못을용서하지
않으실것이다.’마태6:14-15.
왜용서하는가.
내가용서받기위해서다.
내가정죄되어죽지않기위해서다.
내가하나님의용서로구원받기위해서다.
내가하나님의사랑스러운자녀가되기위해서다.

율법학자와바리새인들이간음하다현장에서잡힌여자를예수에게끌고왔다.
그들손에는모세의율법이허용한돌이들려져있었고이제피를보려는욕망으로
들끓고있었다.
‘우리의모세법에는이런죄를범한여자는돌로쳐죽이라고했는데
선생님의생각은어떻습니까.’
한동안예수는침묵했고,그들은대답을재촉했다.
‘너희중에죄없는자가먼저저여자를돌로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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