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행복.
법정(法頂)은학승(學僧)이다.
글자그대로평생을공부하는승려다.
그래서나는그분을존경한다.
생각과말과행동이올바르기때문이며그가쓴글들은진솔하기이를데없다.
지금처럼혼탁한종교계에서그분은우리에게기준과기대를가질수있게하는
큰스님이기도하다.
그분의본명은박재철이며1932년10월8일전라남도해남에서출생했다.
이미우리나이로76세의노인이다.
그런데도늘꼿꼿하고건강해보인다.
전남대학교상과대학3학년을마쳤을때통영에있는미래사(彌來寺)에서당대의고승인
효봉(曉峰)스님을은사로출가했다.

그리고같은해7월,
사미계(沙彌戒)를받았다.
사미는불문에들어가십계(十戒)를받고정식중이되기위한구족계(具足戒)를
받기위해수행하는것이다.
구족계는비구와비구니가지켜야할계율(戒律)이며비구에250계,비구니에500계가
있다.
줄여서구계(具戒)라고도말한다.
1959년3월통도사의금강계단에서자운(慈雲)스님을계사로비구계를받았다.
비구(比丘)는출가하여구족계를받은남자중을이르는말이다.
그뒤지리산쌍계사,가야산해인사,조계산송광사등여러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한바있다.
수선은선정(禪定)을수행하는것으로서참선(參禪)하여삼매경(三昧境)에이르는
것을말한다.
1970년대후반에는송광사뒷산에작은암자인불일암(佛日庵)을짓고청빈의삶을
실천했다.
2005년이후로는강원도산골에서화전민이살던오두막에서스스로땔깜을구하고
채소밭을일구면서청빈의삶을계속하고있다.

1996년,
7천평의대지와40동의건물이있는성북동소재의유명한요정’대원각’을,
소유주김영한여사(1916-1999)로부터시주받았으며,이듬해이를’길상사’로
고치고회주가되었다.
회주(會主)는법회를주장하는법사(法師)를이르는말이다.
2003년12월,
법정은길상사를주지인덕조스님에게맡기고회주의자리에서물러났으며10년넘게
살고있는강원도산골의오두막으로돌아갔다.
자기의위치가어디인지를아는자만이할수있는일이다.

지난10월19일오전,
길상사에서는가을정기법회가있었으며,
법정은이법회에서우리가귀담아들어야할자신의소중한생각을피력했다.
그분은법문을통해,
‘청명한가을날씨를보면새삼감사한마음이든다’고했으며
‘행복과불행은외적상황이아니라내적으로어떻게받아들이느냐에달렷고’고
강조했다.
법정은자신의경우를소개하면서우리스스로가자기안에서행복찾기를권했다.
물론우리는그분과같은청빈의생활을하기는어렵다.
그러나그근본에서인간이가지는행복은질적으로같은것이며방법과환경은달라도
그행복에도달하는길은크게봐서같은것이아니겠는가.
우리가법정의진솔한이야기에귀를기울여야하는이유도거기에있다.

그분은자기의삶에서맑은여백을주고,일상을녹슬지않게하는네가지행복을소개
했다.
모두가평범한것이고일상적인것이어서더마음에다가오는말씀들이다.
그첫째가마음의벗이되는책이다.
정말학승다운얘기다.
역사적으로모든사회에서서책(書冊)은일부계층의전유물이었다.
일부사대부(士大夫)계층을제외한대부분의사람들은문맹(文盲)이었다.
서양이구텐베르그의인쇄술발명으로책이급속히보급된것과대조적으로우리사회
에서는그런혁명적인사건이없었다.
책을읽지않는지금의나쁜풍토는어떤의미에선세습적인것이기도하다.

점토판에쐐기글자를썼던’수메르’문명이래파피루스와양피지,그리고종이책이
만을어지기까지의문명사에서책-독서는호모사피엔스의문화적DNA가되었다.
글자가있음으로서책이만들어졌고책이있음으로서지식이전달되고학문이일어
날수있었다.
체험적인얘기이긴하지만,
사람들이모여앉아있는모든대합실에서책을읽는사람이많은곳이선진국이고,
책읽는사람을찾아볼수없는곳이후진국이었다.
그지식의차이가국력과문환수준의차이인것이다.
경제적물량에서는쿠웨이트와영국이같다해도문화적인삶의질에서는천지간
차이가나는게그때문이다.
사람도마찬가지다.
아무리훌륭한제도교육을받았다해도책을읽지않으면발전할수가없다.
삶의여백이좁아지고녹술게되는것은당연하다.
인간,인간성에접촉하는방법에서컴퓨터는책의대체가될수없는차원이다.
인터넷에서는’삶의질감’을체험하지못한다.
그러나책은그것을만질수있는촉감에서가장뛰어난’인간의벗’이다.
영원히그렇다.

다음이무료할때마실수있는차(茶)라고했다.
차-茶는,
천천히마시면서음미하는음료다.
왜천천히마시는가.
생각하면서마시기때문이다.
다기(茶器)가발달한것도차를마시면서눈으로는그림,색깔을보며생각하기때문
이다.
다도(茶道)는’여백’을즐기는세련된인간의자세다.
인도의동,서고트산맥을여행하면서본어마어마하게넓은차밭은,그규모에서
세계적이었다.
수요가그만큼크다는얘기다.
차-茶는정말여백이다.
우리는왜커피에매료되는가.
사실은맛보다도그향기때문이다.
커피향,커피냄새,
그자극적이고섬세한냄새가우리를어떻게매료시키고있는가.
스님의말씀은정말이다.

다음이굳어지려는삶에탄력을주는음악이라고했다.
법정의성경지식이나사양고전음악에대한이해와수준은범상치가않다.
정말모든음악은’영혼이거니는뜰’이다.
유행가는즐겁고,고전음악은우리를각성케한다는말은정말이다.
음악의시작은타악기(打樂器),그리고현(鉉)과관(管)이었을것이다.
지금도오케스트라의기본편성은그순서그대로다.
동,서양의음계가다른것은전적으로토양의문제일뿐이다.
음악이우리의삶에탄력을준다는것은감성(感性)을자극하기때문이다.
기쁨과슬픔의감정적변화없이산다는것은목석(木石)이돼간다는뜻이다.
음악이우리에게주는그정서적선물은우리의순수한인간성을지켜주는울타리
라고할수있다.
그래서음악의세계도영원한것이다.

마지막이자기의일손을기다리는채소밭이라고했다.
지금쯤법정은일급농사꾼이자살림꾼일것이다.
그가쓴글에,장마에김치단지가떠내려가는얘기가있는것을보면알수있는일이다.
채소밭은,
인간와자연이접촉하는구체적인현장이다.
우리가주말이면산과들,강과바다로가려는마음은그게우리의본향이기때문이다.
자연과접촉하지못하고사는현대인은그런의미에서불행한사람들이다.
특히콘크리트와아스팔트위에서만자라고있는애들이더가엽다.
추수가끝난논에내려앉은큰기러기떼를보는것만으로도기쁨이넘친다.
수로를따라걷는동안은잡념같은건있을수가없다.
인간은자연속에있으면’치유’된다.
법정은그은밀한비밀을터득한분이다.
그분이전기도들어오지않는강원도산골짜기에서나오지않는이유중하나도그것일
것이다.
누가그은밀한기쁨을방해할수있겠는가.

행복은어떤정형이있는것은아니다.
사람에따라,서로다르게느끼는마음인것이다.
생긴게다르고성격이다른것과똑같은것이다.
그러나가장큰공통점은,
그모든행복이’일상-日常’안에있다는점이다.
말하자면이미자기가가지고있는데발견하지못하고있을뿐이다.
책을읽는즐거움,
차를마시는여유로움.
음악을듣는기쁨과만족감,
자연에안겨치유되는놀라운시간모두가일상적인것들이다.
‘돈’은그것들에다가서는수단,방법이지결코행복자체는아니다.
언론은법정이말씀하신법문에대해,
‘최근어려운상황으로고통받는사람들을위로했다’고전하고있다.
우리가그말씀에귀를기울여야하는이유도마찬가지다.
법정이건강하게,오래도록우리옆에계시기를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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