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기독교라는종교를가지고그리스도-기독(基督)을믿는사람들을기독교인이라
부르며다른이름으로’그리스도인’이라고도부른다.
基督은’그리스도’의한문음역(音譯)이다.
그리스도인은영어의Christian의번역이며이단어는헬라어kristianous에서유래된
말이다.
한편’크리스티아누스’라는헬라어는사도행전11:26절에처음나타나는데그장소가
수리아’안디옥’이다.
수리아는’아람’의다른명칭이며’다마스커스’를수도로하는Syria이기도하다.
이스라엘과레바논,그리고그위에수리아가위치해있다.
일찍부터아람사람들은페니키아로부터비옥한초생달지역전역에퍼져살았으며
이스라엘과는불가분의관계에있었기에그역사도서로얽혀있다.

스데반의순교후,
많은그리스도인들은핍박을피해여러곳으로흩어졌으며사도행전에의하면
싸이프러스와키레네사람들이수리아안디옥에정착,그곳이방인들에게복음을
전했다고한다.
이소식을들은예루살렘교회는’바나바’를그곳으로파견했으며그는소아시아
(지금의터키)의’다소’까지올라가서’바울’을안디옥으로데려왔다.
그들은일년동안그곳에서선교활동을했으며그때처음으로안디옥사람들은그들을
‘크리스티아누스’라고불렀던것이다.
안디옥에대한누가의소상한설명은그가안디옥출신이거나아니면안디옥주민
이었을것이라는추측까지낳고있다.
당시의수리아안디옥은로마판도안에서로마,알렉산드리아다음의세번째로큰
도시였으며50에서80만의인구가살았고2만5천에서5만정도의유대인들이거주하고
있었다고한다.
(당시파레스타인전체의인구가70만정도였다.)
한편이곳은헬라문화가지배하는상업의중심지로동방세계의관문이기도했다.

안디옥교회는예루살렘을제외할때초대교회시대그어느곳보다도중요한역할을
했다.
최초의이방인교회가이곳에설립되었으며바울에게는선교여행의근거지이자보루
이기도했다.
안디옥교회는헬라파유대인과히브리파유대인,그리고이방인들로구성된혼합체였다.
인종,문화,언어를초월한,오직그리스도를중심으로하는최초의이방교회였다.
한편헬라파유대인들은이이방문화권에서’예수"를유대적표현인’메시아-구세주’로
전하지않고이방인들이익숙하게사용하는칭호인키리오스-kyrios-主(주)로전했다.
노예가그주인을부르는이호칭이신학적으로’메시아’호칭이가지는신앙적의미를
완전하게전할수있었는지는미지수다.
요한복음을읽어보면이문제는더명확해진다.
‘메시아-크리스토스-그리스도’는kyrios이상의존재이기때문이다.
안디옥교회에대해특기할사항하나는,
주후46-47년의극심했던가뭄때에자기들도어려운중에더큰어려움을겪고있는
예루살렘의형제들을위해물질적도움(헌금)을준일이다.

수리아안디옥사람들이그들을’크리스티아누스’라고부르기시작한것은부정적인
면과긍정적인면이같이있었을것이다.
사실안디옥사람들은그리스도를예수의개인적인이름으로알고있었다.
그러나그호칭은결국크리스챤-그리스도인으로정착돼고오늘날모든기독교인의
고유한이름이된것이다.
그렇다면크리아티누스-kriatinous는어떤뜻을가지는호칭인가.
크게세가지의미를가진다.
‘그리스도에속한자.’
‘그리스도를머리로하는사람들’
‘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자들’이그것이다.
이명예스러운이름은사도행전11:26,26:28,벧전4:16절에세번나타난다.
한인간이예수를믿고’그리스도인’이된다는것은,
그리스도를머리로하고,그에게속하고,그분을따라가는생활을하겠다는결심인
것이다.
정말’그리스도를따라가는사람’이되는것이다.
그일상이내용적으로달라질수밖에없다.

그게어떤사람이든,
진정한의미의크리스챤-그리스도인이되기위해서는크게세가지단계를거쳐야한다.
오랜옛날부터교회가교인들의교육에힘쓰는이유가그때문이다.
기독교는오래된’경전’을가지고있는대표적인고등종교다.
특히신약성서의’공관복음’은예수에대한가장핵심적인내용들이기록된책이다.
가장기본이되는첫째단계는,
내가믿으려고하는’예수’에대해아는일이다.
그가누구이며,
무엇을어떻게주장하고가르쳤는가.
그가르침의내용은어떤것인가.
2천여년전에주어진말씀들의현대적의미는무엇인가.
‘예수’를제대로알지못하고는넘을수없는고개가그것이다.
한가지주의해야할점은,
이미’해석된예수’만의지해서는안된다는점이다.
종교생활은’자기체험’이가장중요하다.
인간예수를만나야하는이유도거기에있다.
그것은’교리’를뛰어넘는문제이기도하다.

어렵더라도스스로성경을읽고예수를알아야한다.
공관복음에는60개가넘는그분의주옥같은예화들이있다.
농부이고,석수에목수였던팔레스타인의젊은이가얼마나위대한정신의소유자
였는지는이아름답고쉽게얘기된예화들을읽는것으로도충분히알수있다.
올바로된,건전한신앙을가지기위해서는반드시인간예수를알고,파악하고,
이해하고,만나야한다.
성경을읽지않고는불가능한일이다.

다음이소화의단계다.
읽고파악한내용들을이해하고,수용하는단계가그것이다.
짧은시간에많은음식을먹으면체한다.
성경내용은천천히,반복해서읽어야제대로소화시킬수있다.
그래서’속성과’는금물이다.
엊그제예수믿은사람이오늘’방언’하겠다고나서는게대표적인사례다.
대개의사이비들이이범주에속한다.
한편,
변질된음식을먹으면탈이난다.
변질된기독교,변질된신앙내용은그자체가종교적인독(毒)이다.
자고로그안에독을가지고있는모든것들은겉모습이매우아름답다.
악(惡)이더근사하게보이는것도같은이치다.
지금얼마나많은그리스도인들이잘못된길을가고있을까.
자기도모르는사이에,분별력이부족해서,사이비들의잘못된가르침때문에,
종교를부귀를얻는수단으로생각해서변질된음식을먹은사람들이그들이다.
신앙의길은한번잘못들어서면빠져나오기가아주어렵다.
그만큼호소력이강하고,접착력이크기때문이다.
절대성의강조가그런것이다.
일종의마비현상이며중독현상이다.

또한가지는너무빈약한음식을먹으면영양실조에걸린다.
성경을스스로읽지않고도그리스도인이될수있다는착각이그것이다.
현대크리스챤-그리스도인들의가장큰약점중하나가성경을읽지않는것이고
가시적인이벤트에집중하는현상이다.
그렇게길들여졌고,또길들여지고있기때문이다.
종교-신앙생활이야말로형식보다는내용이생명이다.
내용이없는신앙생활은결실이있을수없다.
이세상에쉬운것은하나도없다.
하물며한인간의삶을바꾸는종교생활이쉬울수가있겠는가.
그래서그리스도인들이가는길을’십자가의길’이라고부른다.
그만큼어려움이따른다는의미다.
영양실조가심하면결국은죽는다.
성경말씀을’영의일용할양식’이라고하는게그뜻이다.

주께서빌라도의법정에서십자가에못박힌갈보리산까지가신길을
ViaDolorosa라고부른다.
이라틴어의뜻은’고난의길,슬픔의길’이다.
말하자면’십자가의길’인것이다.
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누스는그길을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부귀와영화가아닌희생과봉사,사랑의힘든길인것이다.
세상의쉬운길들을멀리하고스스로험하고힘든길을택하는것은논리적으로는
설명이불가능하다.
그래서,그것은전적으로종교의영역이다.
그것을설명하는키워드가’은혜’와’구원’이다.
성경이사용하는은혜라는말,karismatos는그어근이기쁨-kara다.
그마음이기쁜것,그게은혜다.
그래서은혜의자리에있는크리스티아누스는고난의길을가면서도기쁜것이다.
거기에는그모든것을차고넘치도록보상해주시는아버지하나님에대한확실한
믿음이있기때문이다.
이은혜의자리에있는사람들이soteria-구원된사람들이다.
물에빠져죽게된사람의형편과건짐을받고살아난형편은엄청난차이가있다.
그게’변화’인것이다.
1914년R.H.McDaniel은,
유명한찬송가의가사를썼다.
‘주예수내맘에들어와계신후변하여새사람되고,
물밀듯내맘에기쁨이넘침은주예수내맘에오심.’

그게누구든,
예수와만나면변화한다.
한번난사람은깨지고두번째로나기때문이다.
평생을예수믿어도예수를만나지못한사람들이있는가하면엊그제예수를믿었어도
예수를만난사람들이있다.
그래서신앙의세계는신비한것이다.
가장건전한그리스도인의모습은겉이아니라그안에예수의마음-정신을품고사는
사람들이다.
예수정신으로세상을사는것,그게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인이다.
오늘의수많은명목교인(名目敎人)들이이이름에서멀리떨어져있는것을보면가슴이
아프다.
2천년기독교역사를살펴보면수많은사이비와반교회적변질들이있었다.
지금한국교회는그런의미에서가장어려운시기를통과하고있다고봐야한다.
이대로가면자칫기독교아닌딴것이될수있기때문이다.
그런조짐들은이미충분히나타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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