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의 옷.
역사,그중에서도문화사를잘읽어보면뜻밖에도이세상에는수많은종교들이
나타났다사라진사실을알수있다.
그리고이런현상은지금도계속되고있다.
학문적으로종교는분명히하나의’문화현상’이며,때문에시대와함께명멸할수도
있는것이다.
상대적인간에대해절대성을가지는종교가어떻게사라질수있는것일까.
옷을제대로입지못했기때문이다.
수천년을이어오고있는종교들의공통점은글자로기록된경전과함께그종교가
입고있는옷이탄탄했기때문이다.
종교가가지는신앙적내용은,
그것이아무리절대적인것이라해도그내용을담는’그릇’이없으면사라지게된다.
대표적인그릇은말할것도없이내용에대한’형식’이다.
말하자면형식이라는견고한옷이있어야역사의긴시간속에서닳지않고존재할수
있는것이다.

로마카톨릭에서제1대교황으로호칭되는과격한성격의어부베드로는예수의수제자
였다.
그는,로마에서십자가에꺼꾸로매달려순교할때까지평범한유대인의옷을입고
있었다.
그리고2천여년이지난지금,
그의유해위에세워진성베드로성당(일면바티칸성당)에는지극히화려한복장을
하고있는교황이로마카톨릭세계의수장으로자리하고있다.
어부베드로의평범한옷과오늘날의화려하기그지없는교황의복장사이에는
기독교의’이끼’가그두께를설명하고있다.
예수와는직접적으로아무연관이없는교황의복식은긴역사를통해하나하나의
부분에의미가부여되고그게전통이되어나타난견고한’형식’인것이다.
제1대교황베드로의’순수한신앙’이지금의교황에게완벽하게승계되었다는보장은
없다.
내용을담는그릇,그형식에이끼가두껍게끼면서본래의것이보이지않을가능성이
더높기때문이다.
특히로마카톨릭은경전보다는전통을더우선하기때문에더그렇다.
옷은그렇게위험한것이기도하다.

또하나의견고한옷이교회건축양식이다.
하늘을찌를듯한뾰죽탑의고딕식건물은그바탕이로마시대의’공회당’건축이다.
기독교가로마의국교가되었을때교회는자기식대로의’예배당-건물’이없었다.
오래동안박해를피해숨어있어야했기때문이다.
갑자기주어진해방과자유는다수가모이는공간이필요했고,가장손쉽게사용할수
있는게’공회당’이었다.
앞뒤를막아외부와차단하고,드높은천정공간의창문에스테인드글라스만입혀도
분위기는쉽게일신할수있었다.
지금의명동성당이그전통적인맥을잇고있는기독교건축물이다.
"예배당"건축양식자체가세상과의차별을전제하는것이고하늘에닿을듯한첨탑은
인간의기원(祈願)을상징했다.
예배를위한모든음악은서양고전음악의모태였으며파이프올갠의놀라운발전은
그결과의한가지다.
지금한국개신교예배당들의잡다한모습은그전통에서는크게비켜나있는,근본을
알수없는잡종들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종교가입고있는옷중가장결정적인것은인간이경전을해석한’교리-敎理’다.
모든종교의무서운근본주의는실로이교리에서비롯되고있다.
이슬람의근본주의가코란으로돌아가자고외치는것이그것이며오늘날아랍세계의
온갖낙후성은대부분이그런주장에서비롯됐다고해도과언은아닐것이다.
교리가위험하고무서운것은,
신앙내용에서시작된해석과설명이나중에는경전을속박하는굴레가된다는점이다.
신앙내용은사라지고교리가강조하는교조적(敎條的)인덫이사람들의발목을잡아
앞으로나갈수없게한다.
궁극적으로는’예수에대해서’만알게되고’예수’는모르게된다.
그래서교리는필요악이될수도있다.
종교가입게되는옷중에서교리는가장중요한것인동시에가장위험한것이기도한
이유가거기에있다.

마가복음2장23-28절사이에기록된’안식일논쟁’은예수가어떤분인지를극명하게
보여주는장면이다.
어느안식일에예수의일행이밀밭사이를지나가게되었을때제자들이밀이삭을잘라
손으로비벼먹었다.
(손으로비벼먹은기록은누가6장1절의병행구)
분명히배가고파서그랬을것이다.
바리새인들은즉각이를시비하고나섰다.
안식일규례에서,
밀이삭을자르는것은무방하지만,
손으로그것을비비는것은’타작’으로해석,’노동’으로간주하는게교리였다.
안식일을거룩하게지키라는제4계명에대한극단적인확대해석이이런교조적인교리
를만들어낸것이다.

예수의반격은주저함이없었다.
‘아히멜렉’제사장때,
다윗과그일행은배가고파제사장이외에는먹을수없는진설병-하나님앞에드린빵을
먹지않았는가.
다른음식이없어굶어죽에되었을때그빵을먹고살아나는것이인간을향한하나님의
뜻이아니냐하는말씀이다.
그리고정곡을찌르는말씀을하셨다.
‘안식일이사람을위해있는것이지,
사람이안식일을위해있는것은아니다.’
그당시로서는가히혁명적인선언이다.
교조적인교리를넘어안식일의근본정신을얘기하고있는것이다.

마가는이어3장1-6절사이에서다시한번바리새인들을압도하는예수를묘사하고있다.
어는안식일에,예수께서한회당에들어갔는데마침거기에손이오그라든사람이
있었다.
모두가지켜보고있는가운데주께서는그를불러앞으로나오게했다.
‘안식일에착한일을하는게옳은가,악한일을하는게옳은가.
사람을살리는것이옳은가죽이는것이옳은가.’
아무대답이없는그들을노기띤얼굴로보면서탄식했으며,그손을고쳐줬다.
6절은,
‘그러나바리새파사람들은나가서즉시헤로데당원들과만나예수를없앨방도를
모의했다.’고기록하고있다.
자기들의’교리’를지키기위해본래의정신을제거하겠다는음모인것이다.
교리의옷은그렇게무서운것이다.

교리라는옷은죽는법이없다.
발전에발전을거듭,더욱세분화되어경전을밀쳐낸채그자리를차지,인간을오도
하고옥조이고예수에게서멀리멀리떼놓고있다.
지금예루살렘에는’정통파유대인’들이많다.
그뜨거운땅에서검은색정장에코트까지받쳐입고머리엔까만중절모까지쓰고있다.
그이상한복장은본래의유대교와는전혀무관한,중간에어떤이유로생긴복식전통
인것이다.
그들이모여사는구역엔,
안식일에응급환자가생겼을경우앰브런스가들어가지못한다.
돌이날아오기때문이다.
거룩한안식일에앰브런스는확실한’노동’이며이는사람이안식일을위해존재해야
된다는극단론이기도하다.
그환자가죽어도앰브런스는안된다는이교리는’교리라는옷’이종교를어떻게
변질시킬수있는지를가장확실하게보여주는현대판’사례’가될수있다.
2천여년전의바리새는지금도이렇게살아있는것이다.
본문에대한이러한극단적인해석의폐해는생각보다훨씬심각하다.

신구약성경의’공동번역’은신,구교가합심해서만든세계최초의유일한번역성경이다.
직접원문을텍스트로한,신,구교전문가들에의해번역된책이다.
우수한번역과읽기쉬운문장은누구에게나성경의근본내용을알기쉽게전달하고있다.
그런데이우수한공동번역성경이개신교에서는공식예배에서쓰이지않고배제되어
있다.
가장큰이유는’하나님’을카톨릭용어인’하느님’으로번역했기때문이다.
개신교의경우’한분이신하나님’이라는뜻으로’하나님’이라는,우리말에없는
이름을만들어쓰고있으며,공동번역에서는본래우리말인’하느님’을채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엄격히말한다면하나님도하느님도그분의이름은아니다.
그분은스스로를야훼’라고밝히지않았는가.
유대인들은그분을’야훼’라고직접부르는것이외람되어’아도나이-주’라고부른다.
하나님과하느님이싸우는것은’번역된성경’이중요한게아니라인간의생각이더
중요하다고주장하는바리새적교만때문이다.
누구나쉽게읽고,그깊은뜻을이해하기쉬운’공동번역성경’이부족한인간들의
수준미달의고집때문에배제되고있는게한국교회의현실이다.
이런사례에서비롯될수있는비슷한일들은수없이많을것이다.
교회의모든변질은실로인간에의해만들어진다는전제가설명되는소이가그것이다.

학승법정(法頂)은,
모든종교의경전은신자들이소리내어크게읽어야한다고주장한다.
이게무슨말인가.
직접부딪히라는얘기다.
이보다더확실히교리의옷을벗어야한다는주문이따로있겠는가.
교리는끝까지경전을해석하고설명하는인간들의얘기다.
경전에대해서는부차적인것이될수밖에없다.
그것이아무리오래된전통의옷을입고있다해도마찬가지다.
그래서교리는완전할수가없다.
시대에따라달라질수있는게해석이다.
그만큼가변적이고위험한것이기도하다.

지금한국의크리스챤들은너무나오래동안교리에사육되었기때문에
‘예수’에대해서는거의모르면서,
‘예수에대해서’는흡사전문가들같다.
예수정신과신자들사이에교리라는종교의옷이견고하게버티고서서그둘을갈라
놓고있기때문이다.
종교의옷인교리는,
인간예수를차단하고오직절대적으로신격화된불가촉의예수만보여주고있다.
직접예수를만날수가없는것이다.
그어떤인간이라해도먼저인간예수에매료되지않고는진정그를사랑할수는없다.
먼저,사도신경이아닌,
‘사람이안식일의주인’이라고선언하는나사렛의놀라운청년을만나야한다.
그를’하나님의아들그리스도’라고신앙고백하는것은그다음의일이다.
경전을큰소리로읽으라는얘기는그게첫걸음이라는뜻이다.
이끼를걷어내지않으면본질은볼수가없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