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들을 압박하는가.
내가고등학생이었던1950년대,
우리집에있었던가전제품은그때막생산을시작한금성사의트렌지스터라디오가
유일한것이었다.
아버지가들으시던커다란나무상자의진공관식일제라디오는오래전에고장이나서
들을수가없었다.
대학을졸업한후한,일합작회사에다닐때회사에는매일마이니찌,요미우리,산케이
신문이배달되었다.
나는신문기사보다는신문지면하단에실린광고에더깊은관심을가졌었다.
오디오세트,텔레비전,냉장고,자동차에대한광고들이그렇게부러울수가없었다.
우리에게는불가능한일처럼보였다.
1950년대,대부분의가정에는전화,선풍기,라디오,오디오세트,텔레비전,CD,DVD
풀레이어,냉장고,에어컨,세탁기,자가용이없었다.
그건꿈도꿀수없는물건들이었다.
내가취직한후가장먼저집에사들고간것이선풍기였다.
그때까지도우리집엔전화가없었다.
그때는모두가그렇게가난하게살았다.

사회과학분야의학자들은,
지금우리가살고있는이시대를물량,또는물신의시대라고정의한다.
물량(物量)은물건들의양,숫자를의미한다.
물량시대라는것은결국풍부한물자를쓰면서사는시대라는뜻도있을것이고,
‘물질을우선하는‘물질주의시대라는의미도있을것이다.
여기에비해물신주의(物神主義)는물신숭배(物神崇拜)의다른표현으로서,
원시종교에서는자연물이나주술적인물건을숭배하는것이었으며,
지금과같은현대의자본주의사회에서는인간노동의생산물인상품,화폐,자본등
의물질을숭배하는것이라고정의할수있다.
말하자면물신주의는‘물질’을최우선으로하는가치관과이념이라고할수있다.
지금물량,물신의대표적인대상은온갖물질-상품을구매할수있는‘돈’이다.
특히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에살고있는현대인들에게있어‘돈’은모든문제를
해결할수있는수단으로자리잡고있다.
한편‘돈’은대인관계,가족관계까지도깰수있는위력으로인간의심성을황폐케
하는역기능으로작용하기도한다.

지금은그누구라도‘돈’을많이벌어야한다는압박감에시달리는시대라고할수있다.
그만큼스트레스도크게받는다.
자본주의사회는한개인이‘돈’이없으면하루사이에노숙자가될수있는구조다.
실현불가능한‘사회주의’가그실험이끝나붕괴되었음에도불구하고‘복지’라는
허상으로사람들을현혹할수있는것도그때문이다.
지금처럼취업이어렵고직장에다닌다해도조기퇴사를종용당하는시대는‘돈’에
대한집착이더커질수밖에없다.
다른한가지는자본주의사회가안고있는빈부격차의문제가있다.
이격차는사람들에게‘상대적박탈감’을가지게하며빈곤층의경우‘부-富’자체에
대해반감까지가지는위험한수준에이르게한다.
‘돈’은대표적인물량이며물신이다.
돈만이최고라는이념에는‘정신적가치’가자리잡을공간이없다.
가족이해체되고인간적단절들이나타나는이면에는반드시물신주의가있는게그
증거다.
그러나인간은‘빵’만으로살수있는존재는아니다.
우리옆에온갖장르의‘예술’이있다는것은인간이‘정신적존재’임을가장확실하게
알려주는현상이라고말할수있다.

‘성공’이라는매력적인단어는,
목적했던일에잘대응하거나최선을다해그뜻을이루는것이며,
인간이사회활동을통해높은지위나재물을얻게되어크게그이름을떨치는것이기도
하다.
그래서모든사람들은‘성공’을위해자신의최선을다해여러가지로경쟁하고있으며
그자체가엄청난압박과스트레스임은더말할것도없다.
우리처럼다양성이부족한사회에서는성공과그성공에이르는길이단선(單線)일수
밖에없다.
그만큼압박과스트레스도크다.
그대표적인공식이일류대학진학,대기업취직,결혼,승진과수입의증가등이다.
학원이라는사교육시장이공교육을대체,그범위를넓히는것도,
헬리콥터맘이바람을일으키는것도,
대학을졸업하고,군대에가서까지도‘마마보이’가있는게모두그때문이다.
300만에육박하고있는청년실업의핵심에‘백수’가있고,
그들은‘성공’압박과그것을위한경쟁에서탈락한사람들이다.
지금으로서는재기의가능성이거의보이지않는다.
시간이지나면서후배들에게빌려기회에서는더멀어지게된다.
눈부신천부(天賦)를가진아까운젊은이들이‘성공단선사회’의희생물이된것이다.
이보다더안타까운일이어디에있겠는가.
그절반은안목이없는부모들의책임이기도하다.

나는아버지의어깨넘어로신문을읽었다.
그때신문은세로로인쇄되었으며언제나4면이었다.
그리고한문이한글보다더많았다.
초등학교4학년때아버지앞에서먹을갈아신문지에천자문을붓으로쓰면서배웠기
때문에거의모든한자를읽을수있었다.
지금은일간신문의평균지면이50여쪽이다.
엄청난정보가매일배달되고있는셈이다.
지금우리들은‘정보화의시대-정보의바다’에살고있다.
숫자로환산하면매일일간지177가지가배달되는것과같은양이라고한다.
정보는,거의가날것이기때문에익혀야활용할수있다.
그게선별이고선택이다.
따라서매일전달되는정보의양자체는엄청난정신적압박인셈이다.
그정보들을선별하고선택하는것은분별력과안목이며이것들은‘읽기’를통해서만
얻을수있다.

대표적인읽기의한가지가‘종이신문’이다.
지금은종이신문이인쇄되어나오기전에독자들이먼저정보-사건을알수있는
스마트시대다.
따라서종이신문들은단순한정보의보도보다는정보의선택,선별과함께‘해설’이
위주가되어있다.
일단종이신문에실리는기사들은‘선별’된것들이며‘해설’에비중을두기때문에
‘학습효과’가아주크다고할수있다.
한가지,또는두가지의일간지만정독해도어느정도의분별력과안목을갖출수있다.
이에반해여러가지‘무가지’는그속성상해설기사는실을수가없다.
전문가들을채용할경제력과정보를소화할수있는조직이없기때문이다.
종이신문이‘단순보도’에서‘선별과해설’로바뀐것은시대적인요청이기도하다.
부지런한독자라면그신문을정독하는것만으로도상당한수준의안목을가질수있다.
정보들을익히는지식은읽기를통해서만얻을수있다.
많이읽는사람이앞서가는것은당연한일이다.
때문에정보의바다에익사하지않기위해서는‘독서’가필수불가결한조건이된다.
그런데현대인은책을읽지않는다.
모니터를일별(一瞥:대상을한번흘낏보는것)하는습관이진득하게독서할수있는
인간의정신적기능을앗아갔기때문이다.
‘지식문맹’이양산된게그때문이다.

안보(安保)는편안하게보전한다는뜻과함께,
안전보장(安全保障)의준말이기도하다.
외부의침략이나공격으로부터국가와국민의안전을지키는일이그것이다.
우리의안보대상은일차적으로북한이다.
땅위에남아있는마지막‘스탈리니즘’의세계최빈국의감옥국가이자일인독재의불량
집단이기도하다.
비무장지대에집중배치된장사정포는그타깃이‘서울’이다.
천암함과연평도를겪으면서우리는그들의무모한호전성을확인한바있다.
그런데,그들보다더무서운내부의적들이우리와함께살고있는게지금의안보현실이다.
친북좌파와종북좌파가그들이다.
그심성이태생적으로꼬여있는사람들이기때문에전향은불가능하다.
그들은,가장두려워해야할내부의적이며우리들을안보적으로압박하고있는
김정일의하수인들이다.
그들의집요한‘보안법철폐요구’는북의지령이먹혀들고있는증거다.
우리모두는상대적으로이무서운압박에대해무지하거나외면하고있다.
그러나외면한다고해서해결될수있는문제가아니라는데그심각성이있다.

각가정에는매일배달되는일간신문에는,
하루에도여러가지의광고지가끼여있다.
사람들의시선을끌기위해자극적인원색으로인쇄된그광고지들은상품의한쪽면만을
강조하는속임수들이다.
소비자들이당하는피해의대부분은그광고들의속임수때문이다.
광고는자본주의경제에서매출과직결되는홍보수단인것은사실이지만그충동적인
문구들과허위내용,자극적인사진들은우리의건전한정신을좀먹는장사꾼들의집요한
‘압박’임을잊으면안된다.
입적하신법정께서는,
‘광고에저항하라.’고했다.
저항은굽히지않고맞서서겨루는것이다.
반대방향으로움직이는힘이기도하다.
이세상에서온갖것을타락시키는주범이광고의실체인‘상업주의’다.
상업주의는그게무엇이든단지돈벌이의대상으로보는영리-이익위주의사고방식
이다.
돈은귀신도부린다는게그들의생각이다.
이러한상업주의의척후병이곧광고다.
광고의압박을이기는길도분별력과안목이다.
자기안에가지고있는강력한정신적기준만이광고를물리칠수있는힘이다.

2011년5월말현재,
우정사업본부가접수,보관하고있는분실된스마트폰은전부3.416대다.
대당가격을생각하면엄청난금액이며숫자다.
바야흐로스마트시대에살고있는현대인들은손에서스마트폰을놓지못한다.
스마트폰의기능과‘앱’을연결하면그게바로스피드다.
더많은정보를더빠르게얻을수있는시대인것이다.
세상의이치-진리는‘빠르면깊이가없다’고경고한지오래다.
빨라지는것이나쁘다는게아니라‘깊이’를잃는것이위험하다는얘기다.
오뚜기가쓰러지지않는것은그깊이,바닥에무게중심이있기때문이다.
오뚜기는그누구도그무엇으로도쓰러뜨리지못한다.
‘깊이’때문이다.
‘스피드’는현대인들에게새롭게나타난아주큰‘압박’임을알아야한다.
그게무엇이든건더뛴과정은나중에반드시비싼대가를치르게돼있다.
압축성장의건너뛴자리때문에진통을겪고있는지금의우리사회가그본이
될수있다.
깊이와무게는기본과기초다.
바닥에그게없으면쉽게쓰러지는게역사의교훈이아닌가.

근자에는좀뜸해졌지만,
몇년전만해도사람들을가득태운연안여객선들의전복사고가많았다.
여객선사고는인명피해가크기때문에무섭기도하다.
전복사고가일어난후그원인을조사,발표할때마다공통적인것은사람과화물이
‘갑판’에만몰려있었기때문이었다.
배는물위에떠있기때문에언제나‘복원력’이있어야전복되지않는다.
그복원력은배바닥에무게중심이있어야만들어진다.
작은요트가거친대해에서도전복되지않는게그원리다.
햇볕과시원한바람이있는갑판에비해배의바닥은어둡고,침침하고견디기어려운
위치다.
지금우리사회는표피(表皮-동물체의표면을덮고있는피부의상피조직)에만모여살고
있다.
돈과유행에는민감하지만그것들을만들어내는기초,기반에대해서는무관심하다.
대학에기초학문이빈약한게그증거다.
기피시설에사람이없다는것은기초가없는집이나마찬가지다.
바닥에서무게중심을잡아주는가장큰집단이‘종교’다.
그런데그종교까지도‘갑판’에나서고있는게현실이다.
정치꾼들의행태는더말할것도없다.
대한민국호는그래서위험하다.
복원력없이큰바다를항해하는덩치만커다란배가아니겠는가.

인간의물리적일생은지극히아날로그적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가바로그‘틀’이다.
그래서우리모두는,
때로텔레비전과컴퓨터를끄고,
휴대폰을손에서놓은채,
낙엽을밟으며오래된돌담길을걸어봐야하고,
산에올라깨끗한공기를마시고나무사이로지나가는바람소리를들어야한다.
해가솟아오르는,해가지고있는바닷가를신발을벗은채걸어봐야하고,
밤하늘을쳐다보며별들의얘기를들어야한다.
‘나는누구인가’.
이질문에대한대답을가지고산다면모든‘시대적인압박들’을이겨낼수있다.
그대답은‘디지털’에서는얻지못한다.
인생이아날로그이기때문이다.
옛날어떤시골마을에서있었던실화다.
해가뉘엿뉘엿넘어가는저녁시간,귀가하던새우젖장사가그마을을바삐지나가면서
‘새우젖사려’를길게외쳤다.
한아낙이사립문을밀고나와새우젓장사를부르자,
‘갈길이바쁜데왜불러,’하면서그대로발걸음을재촉했다.
그렇다면그무거운새우젓독은왜지게에지고있는것인가.
정말그새우젓장사만어리석은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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