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공동체, 누란의 위기.

누란(累卵)은 쌓거나 포개놓은 알이며,
매우 위태로운 형편을 이르는 말이다.
누란의 위기는 쌓아놓은 알이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기다.
나는 80대의 구 세대로서,
지금의 우리사회공동체가 안고있는 심각한 불안과 위태로움은 처음겪어본다.
국론은 분열돼있고, 계층간 갈등은 어떤 선을 넘어서고 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쟁투하는 극단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이런 모습은 없었으며 정말 처음겪는 일이다.
어제는 물질적 으로는 가난했지만 인간성은 자기 자리를 지켰고 윤리와 도덕은
살아있었다.
오늘의 혼란과 혼돈을 수숩하지 못하면 내일은 더 큰 위험이 닥쳐올 것이다.
그게 두려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안고있는 문제들은 개인으로는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힘을 합해야 하고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공동체의 위기는 모두에게 죽고사는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만큼 심각하고 위험수위가 높다.
애써 외면하고 있을뿐이다.

지금 우리공동체가 안고있는 심각한 문제들은 보통사람들의 눈 으로는 그 핵심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때문에 석학들의 혜안을 빌려야 하고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게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박승교수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우리사회의 가장 아픈대목은 계층상승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어느사회나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들이 섞여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도 계층상승이 가능한 열려있는 기회가 있어야 희망적이다.
하나의 예로 교육은 계층상승이 가능한 개방된 기회였으나 지금은 돈 가진 사람들의
세습이 되어 없는사람은 기회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사교육시장은 철저히 돈이 지배하는 구조다.
따라서 있는사람은 양질의 교육으로 자식을 키울수 있지만 없는사람은 불가능하다.
전통적으로 가지고있던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적갈등과 반자본주의, 재벌의 정서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이 문제에서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불안하고 위험한 상태다.
청소년들은 대학입시 때문에 불안하고,
졸업생들은 취업이 안되어 불안하다.
취업했다 해도 집한채 장만하기가 어렵고,
40만돼도 퇴직에 시달려야 한다.
한창 원숙하게 일할 나이인 50대에 퇴직해야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고
60대 이상은 노후보장에 대한 깊은 불안이 있다.
이 모든 불안들은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해결하기 힘들다.
어떤 정권,정부라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공동체가 안고있는 불안의 뿌리는 그 하나가 사회보장제도의 미비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는 뜻이다.
국민연금은 퇴직자들의 일상생활을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입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불안의 연속인 셈이다.
취업, 실업, 노후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보장이 잘 돼 있는 나라가 선진국들이다.
때문에 그 국민들은 ‘불안’을 모른다.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계속 노력하고 개선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가능성은 우리에게도 있다고 봐야한다.

‘지금 우리경제는 성장이 침체되는 위기를 겪고있지만 똑같이 분배의 위기도 겪고
있다.
빈부격차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지만 우리는 승자독식이라는 나쁜 구조 때문에
빈부격차가 계층갈등으로 변하고 있다.
그게 어떤 사회든 가진자와 없는자는 섞여살게 돼 있다.
따라서 부의 재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갈등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중요해 지는게 정부의 조세정책에 의한 조정기능인데 지금 우리사회는 이기능이
크게 미흡하다.
이점 입법부인 국회가 크게 책임져야 한다.
OECD 34개 회원국중 저출산, 노인빈곤,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은 국민의 생활의 질
이 나쁘다는 얘기다.
외형적인 경제지표로는 세계10위권의 국가지만 부의 편재가 심해 보통사람들은 행복
하지 못한게 현실이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 즉 월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의 48%가 면세자로 세금을 한푼도
내지않는 것도 조세정책의 실패로 봐야한다.
수입이 있는곳에 세금은 공평해야 옳다.
많든적든 모두가 함께 세금을 부담하는 사회여야 공평하고 안정적일수 있다.
돈이 가는곳에 마음도 가기 때문이다.‘

박승교수의 성장을 위한 개혁안은,
‘지금의 교육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계층의 대물림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대졸자의 초임이 고졸자보다 60%높다.
그런데도 대졸자의 실업율은 고졸자보다 높다.
전면개편이 필요한 문제다.
대기업의 고임금노조의 강경투쟁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큰 문제다.
사실 지금의 노조는 전체근로자의 10% 정도만 가입된, 대표성이 없는노조다.
나머지 90%가 조직이 없는 모래알들이기 때문에 10%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할 시급한 과제는 규제개혁, 공공부채감축, 시스템 개혁이다.‘
교육기회의 세습화,
지나친 임금격차,
대표성 없는 노조의 강경투쟁,
정부의 지나친 규제는 지금의 우리사회를 옥죄고있는 사슬이라는 얘기다.
이 사슬이 하루아침에 풀릴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사슬을 풀려는 노력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이제는 이 고리들을 풀려는 시도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수있는게 집단각성이다.

또한분의 전문가는 원로 사회학자이신 연세대의 송복교수다.
그의 접근법은 박승교수와는 달리 일부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송복교수의 타깃은 사회상류층, 지도층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지 (nobless oblige-높은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가 그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발전의 동력은 상층집단의 노블리스 오블리지 다.
지금처럼 상층부가 특권만 누리고 의무는 저버린다면 나라의 앞길은 암담하다.‘
그는 불과 두세대 사이에 만들어진 한국의 고위직 집단을 뉴하이(new high-당대
상층)로 명명했으며,
사회 상층부에 위치하며 권력을 지닌 ‘위세고위직층’ 과 그 근접부에 있으면서도
사회적 신뢰가 높은 ‘위신고위직층’ 으로 구분했다.
전자가 고위정치인, 법조인, 관료, 군,경찰들이고,
후자가 고위교육자, 언론인, 종교예술인, 의료인들이다.
이에 반해 서구의 선진국 상층부는 가정과 학교교육을 통해 대대로 전수된 기풍이
교육되어 품격있는 언행과 책임감을 지닌 상류사회를 형성했다.
이들 올드하이(old high)는 문화와 윤리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무의식적으로 행동
해도 절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품위(品位)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뉴하이는,
자신의 힘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지키는데 온힘을 쏟느라 그 자리에 걸맞는 훈련과
도덕적 수련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사회적 지위는 높지만 뿌리가 없어 역사성, 도덕성, 희생, 단합성이 결여돼 있고
천박한 언행으로 다른 사회구성원 들로부터 비난의대상이 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우리의 고위직도 국가관, 사명의식, 열정, 기강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혼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이후 공익성이 약화되고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익집단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제 한국사회의 뉴하이인 상층부가 그 의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못하면 선진국
진입은 어렵다.
우리의 노블레스오블리지를 살리는 방법은 있다.
단기적 으로는 고위직층에 상당히 엄격한 법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지금처럼 법치가 계속 후퇴하면 안된다.
장기적 으로는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에서 양보, 배려, 헌신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처럼 2차집단인 학교에 책임을 떠 넘기면 노블레스오블리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송복교수의 사회상층부, 고위직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은
‘국가운용에 대한 책임’ 에 대한것이기에 그 신랄한 평가가 의미를 가진다.
5천만 모두가 나라일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며 참여할수도 없다.
대의정치의 정신이 그것이며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국회의원 선출이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의 국회는 대표적인 상위지도층이자 국가운용의 1차적 책임을 지는 집단이다.
그들의 부패, 타락, 패거리정치, 특권의식은 오블레스 오블리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위험한 작태이며 그 영향력과 결과는 사회공동체의 분열과 혼란에 직결
된다.
지금 우리사회는 ‘위세고위직종’ 과 ‘위신고위직종’ 모두가 부패와 타락의 늪에
깊이 빠져있다.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인간이 부패하고 타락하면 나라전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졸부’ 로 평가되는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다른 선진국의 특징은 소수의 지도층이 다수의 국민을 향도하는 것이다.
비록 소수라 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기능과 역량이 그
일을 능히 감당할수 있기 때문이다.

1967년 여름,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을 이기고 대승했다.
이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모세다얀 장군은 승리의 원인을 묻는 기자들에게
‘불타는 애국심과 희생적 리더십’ 이라고 대답했다.
전쟁이 끝난후 작성된 보고서를 보면,
아랍측의 사상자 대부분은 사병이었고,
이스라엘쪽은 장교들 이었다.
이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다.
태극기 게양율 1%미만이 우리의 현실이다.
모든 나라에서 국기게양율은 애국심을 타나내는 바로메타다.
여기에 지도층이 썪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더 발전해서 선진국에 진입할수
있겠는가.
노비문화의 잔재와 천민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는한 무망한 일이다.
지금 우리사회공동체는 쌓아올린 알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누란의 위기로 표현
할 수 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모두가 현실로 인식해야 한다.
반드시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불타는 애국심과 희생적리더십,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될까.
정말 깊이 반성해 봐야한다.
오늘, 우리공동체는 북의 핵 위협앞에서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바야흐로 공동체의 역량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다.

생선은 머리부터 썪는다.- 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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