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을 조롱하는 사회.

인간이 살고있는 모든시대는 반드시 그 시대의 시대상(時代相)이 있다.
다른 말로는 사회상 이라고도 한다.
한 시대의 되어가는 형편, 또는 그 모양새라고 설명할 수 있다.
모든시대의 시대상-사회상이 표현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의 하나가 말-언어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한시대는 그 시대에 말해지는 언어들의 양상이나 실태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수준을 알 수 있다.
말은 곧 그 인간이기도 하다.
뱉어내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사회적신분과 소속된 계층을 알수
있으며 정치적 성향까지도 알게된다.
개인의말, 언어는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사회를 넘지못한다.
그래서 말을 들어보면 그시대-사회의 속성을 파악할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사회의 시대상-사회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말-언어의 마지노선이 지켜지지 않고있는 점이다.
사회공동체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에서 약속-법을 기준으로 모여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최소공간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그 선을 넘으면 곧 피해가 발생하며 그게 커지면 사회갈등이 되고 하나의 사회
공동체가 나락으로 떨어질수도 있다.
어 해서 다르고 아 해서 다른게 말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도있다.
때문에 우리모두는 우리들의 사회적안녕과 질서를 위해 하고싶은대로 다 말하지
않고 살고있으며 이 일의 기본은 학교교육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언어의 마지노선은 모두가 서로를 위해 지켜야 하는 마지막 금기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언어-말은 조롱(嘲弄)이다.
조롱은 어떤 사람을 우습게 보거나 형편없는 존재로 여겨 얒잡아 보고 흉을보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폐단의 하나다.
오래전, 시인 신경림은,
‘우리사회에서 절규가 사라졌다’ 고 했다.
대신 조롱이 가장 인기있는 삶의 방식이 됐다.
특히 SNS같은 넓은마당이 생기면서 이제는 조롱이 격심한 경쟁으로 치달아
더 독하고 더럽고 과장되어 만인이 만인을 향해 던지는 창이되고 있다.
어떤 기사에 딸리는 댓글들을 읽어보면 어느수준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절규가 사라진 자리에 조롱이 들어섰다는 것은 진지함이 사라지고 천박하고
표피적인 헐뜯기가 창궐했다는 얘기이며 날이 갈수록 조롱이 다른 조롱을 낳는
깊은 악순환에 우리모두가 빠졌다는 뜻이다.

본래 조롱은 광대의 몫이었다.
광대는 옛날에 가면극, 인형극같은 연극이나 판소리, 줄타기등을 하던, 천대받던
직업적 예능인들이다.
왕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해 직접 대처하는대신 자기와 그 세력
들이 함께 지켜보는 연회장에서 광대로 하여금 그들을 비웃게 했다.
이 일의 효시는 고대 그리스까지 소급될수 있으며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광대들로 하여금 상소리나 성, 돈과 정치를 야유하고 비웃는 역할에 이 조릉을
담아 대중을 즐겁게 했다.
따라서 지금도 남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신분은 백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남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큰 부분이 비어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정신적 지진아인 셈이다.
모자라지 않고서야 누가 남을 함부로 조롱할수 있겠는가.
자칫 그게 인격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가 지금처럼 조롱이 넘쳐나 아무나 조롱하는 것은,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소치가 그러하다.
그게 어떤 사회공동체든 건전하게 살아가려면 ‘권위’ 가 있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권위(權威)는,
남을 지휘감독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하는 강력한 기능-힘이다.
또는 일정한 부문에서 사회적 인정을 받고 영향을 끼칠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
그런사람이다.
반대로 권위주의는 어떤일을 설득이 아니라 직위, 권력으로 해결하려는 폭력적 태도
이며 그러한 태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이르기도 한다.
권위주의는 조롱의 대상이 될수있지만 권위는 조롱하면 안된다.
우리사회공동체는 참된 권위가 살아있어야 정상적으로 운용될수 있으며 발전할수
있다.
대부분의 조롱은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 폐해가
커지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광대가되어 조롱꾼처럼 살고 있다.
정치꾼, 학자, 장사꾼, 종교인들까지 모두가 서로를 조롱하며 패를 갈라 길거이에서
싸우고 있다.
조롱이 생활방식이 되면 엄격함이 사라지게 되고 진지한 대화도 없어진다.
우리사회처럼 이분법과 흑백논리가 판을치는 사회에서는 조롱하는 삻이 더
편할수도 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인지하면서 반드시 걱정해야 하는 이유는 엄격함과 권위가
사라지고 조롱이 마지노선을 넘으면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막가는, 막판
사회가 될수있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세상에 조롱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귄위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하며 권위와 권위주의가 구별될수 있어야
옳다.
그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조롱이 기승을 부리면 의회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
조롱이 범람하면 진지함이 설 자리가 좁아기지 때문에 토론이 사라지고 표결에
진실이 실리지 못한다.
조롱은 또다른 조롱으로 이어지고 비웃음은 또다른 비웃음을 생산, 우리 사회가
더 암담한 굴로 들어가게된다.
일찍이 노신(魯迅)은 말했다.
‘풍자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
풍자(諷刺)는 사악함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롱꾼은 혼자있을 때 비겁하고 떼가되면 위험해진다.
그들이 쓰는말, 표현이 천박하고 야한 것은 심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회전체에 오랜시간 조롱이 퍼져나가면 오염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썪은물에 발을 담가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를수 있다.

세상을 조롱하는 자들은 그 부정적 파장을 즐기되 책임은 지지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궤변뒤에 숨어서 우리사회가 파괴되고 있는 것을 즐긴다.
태생적으로 그 심성이 꼬여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때까지 그늘에서 살지 햇볕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뱉어낸 조롱에 의해 자기들의 영혼이 먼저 오염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남을 조롱하면서 자기도 조롱당하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그게 그들이 받는 하늘의 벌이다.
충북대의 문관훈 교수는,
‘지금의 한국사회는 먹고사는 수준에 비해 말과 행동거지의 수준은 더 없이 초라해
보인다.‘ 고 했으며,
정당, 국회, 검찰, 사법과같은 사회적 공적기구들이 사회적 문제들을 제도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기능이 죽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조롱이 판을치는 것이다.

우리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엇이나 조롱하는 사회’ 는 막지못한다.
어떤가치는 분명 조롱되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의미의 권위도 마찬가지다.
그게 우리사회를 똑바로 서게해주는 척추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심성들의 악의적인 조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화할 수는 있다.
마음을 다잡고 ‘참’을 말하면 된다.
우리공동체를 건전하게 유지하겠다는 신념만 있으면 된다.
사람사는 세상에 조롱이 없을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이나 조롱하는 횡포는 막아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직,간접으로 상처를 입고있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들에게 조롱을 극복할 힘이 없는것일까.
젖가락 하나는 똑바로 세울수가 없다.
그러나 열 개, 백개를 하나로 묶으면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그게 대답이다.

문명의 법칙을 지배하는 것은 숫자다.
그러나 문화를 결정짓는 것은 말-언어다.- 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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