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피난살이 1

무엇인들못먹으리.

기세등등하던공산군놈들이38선이북으로패퇴하면서그냥가진않았다.

마을사람을끌고가며뒤에남은가족들에게엄청난시련을겪게하는등

사람으로서도저히행하지못할엄청난만행을저지르고

민족의가슴가슴마다에뽑을수없는비극의대못을박아놓고놈들은물러갔다.

그때끌려가신분의가족은60년이지난지금도돌아오지않는그분을기다리며

그때그집에서말년의인생을연명하며살고계신다.

9월말경서울이수복되고숨어있던괴뢰군잔당을소탕하면서우리마을도

생기가돌기시작했다.

갖고있는경작할토지가없으니이제부터는남의집품앗이일이나허드레일을

해주며잡곡이라도얻어할아버지할머니와함께먹고살아야하기때문에

아버지와엄마는날이밝으면삶은옥수수와감자몇개를허리춤에차고일을나갔고

할머니도동네이곳저곳을다니시며끼니거리를장만하러다니셨다.

그러나불행중다행이었던일은군청과면청에서

전쟁으로망가진다리와신작로를고치고넓히는공사를하게되어

많은사람들이필요했는데아버지와엄마도거기에참가하여일을하게되었다.

아침8시부터저녁5시까지하루를일하면보리한되를품값으로주었고

또일을할수있는소와같이나가면보리쌀한되를더준다.

(일하러가는소;자료사진)

그러나불행하게도우리집엔소가없었기

아버지와엄마가하루종일공사판에서일을하고서산에해가질때쯤배급표를받았다.

그렇게받은배급표를모아읍내나가서보리쌀을타다가할아버지가계시는단칸방에서

이름도알수없는나물을넣어멀건죽을끓여7식구가하루두끼를먹고살수있었다.

그렇게죽을끓이면서도엄마는꼭보리한두홉을따로모아비축을하면서….

왜냐하면갑자기날이나빠지거나비가오면공사를안하므로그날은배급이없었기에

항상조금씩떼어놓아야했었다.

공사가없는날이면아버지는나를데리고점심때를마추어이동네저동네

마실을다니며장기를두며시간을보내다

막걸리사발이나마시며삶은감자하나라도얻어먹게하였고

엄마는가끔30여리떨어진회남면의친정집(외삼촌댁)으로쌀됫박이라도얻고자

하룻품을팔아다녀오기도했다.

어느날은회남에외갓집엄마의고모댁으로나에게밥한그릇이나얻어먹이려고

오전일찍30리(12km)길을쉬며걸으며놀러왔다는핑계로찾아가몇시간을지난뒤

보리쌀한되를얻어별이뜨는캄캄한밤에야집에돌아온적도있었다.

엄마와어디를가고있었을까?대전방향으로뻐쓰를타고가던중이었으니회남의

외갓집이아니었나생각된다.

뻐쓰에꽉찬사람들틈에끼여서덜컹거리며가는중에뒤에서있던아저씨가자꾸

"꼬마야다왔다내리자~"

해서다온줄알고내려보니엄마가안보인다.

이럴수가?

아저씨말에정말다온줄알고내렸더니그게아니었다,

엄마는안내리고뻐쓰는계속달려간다,너무황당해서그자리에주저앉아

엉엉울어댓더니아저씨가묻는다.

"너왜우냐?"

"아저씨가내리라고했잔아요~엉엉~어떻게엄마~엉엉"

놀란그아저씨가내손을잡고냅다뛰면서뻐쓰를따라쫓아가며

"뻐쓰쓰톱~뻐쓰쓰톱~"

하고외치며뻐쓰가일으키는진흙먼지를뒤집어쓰며소리쳐댔다,한참쫓아가자

다행히뻐쓰가우리를보고달리기를멈추고기다리고있었다.

엄마는만원뻐스안에서내가내렸는지조차도모르고있었다.

오늘(2010년4월28일)도그당시사건을엄마에게물어보았는데기억이없다고한다.

ㅎㅎㅎㅎ

바가지나깡통을찬거지는아니었으나

길거리에버려졌거나땅바닥에떨어진주어먹을음식들은찾아보면꽤있었다,

수박껍데기에붉은색이조금이라도붙어있는것,

남이깍아버리는참외깍은껍데기,

곰팡이가쓸어먹지못하고버린빵이나개떡부스러기,

소풍날아이들이먹다가버리는아이스크림담는껍데기,

배추밭에캐다가버린배추꼬랑지,무꼬랑지,썩은사과,설거지할때흘어나온

개천에가라앉은콩나물대가리와,보리밥쌀알

등을보이는즉시건저서집으로갖어와

위생을생각해서흐르는도랑물에잘닦아먹거나혹은죽에넣어끓여먹었다.

배고플때먹을것은또있다.

소나무어린가지의속껍질,길거리풀삘기,까마중,깜부기(입에넣고먹을때

운이좋으면애벌래도들어있어서고소했다),그리고논밭에나는피,돼지감자,

칡뿌리,그리고기름진영양식으로는가끔개구리,뱀,참새,까치,집토끼,

산토끼,집나온고양이등을

맛있게먹기도했다.

아버지말로는도깨비도어린놈은잡아먹으면질기지도않고맛이있다고

했다.ㅋㅋ

나는도깨비불은보았지만아직도도깨비는한번도잡아보지못했다.

문간방에살았던우리4식구와할아버지,할머니는

쌀이없어굶고,일이없어굶고,비가와도굶고,눈이와도굶고,먹을게없어서도

굶고살았다.

그시기엔우리만그렇지는않았다.

모두가어려웠고춥고배고팠을텐데알량한자존심때문에내색만안하였을뿐서로

숨기고있는듯없는듯세월을보냈다.

1951년정월

엄동설한에,인천화수동에서이발소를하시던큰아버지댁도신포동에

사시던고모부댁도(우리친척중에제일부자였음)인천에서살기가어려웁다며

모두늡실로하향을하였다.

큰아버지는매일술독에빠져살았고고모댁은인천서돈께나갖어와살았지만

그댁도사촌형제가둘이나있기에내자식들먹이기도부족하다며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래도신포시장에서사업(다꾸앙공장)을하시던고모부는자주인천을

왕래하며고모댁식구를보살피고있었기에형편이조금좋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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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이야기가나오겠지만나는고모부덕을많이보고살았으며사촌형이입었던

교복중작아서못입는것은최우선적으로나에게물려주는등물심양면으로

우리집을많이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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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생활1년이못되어,늡실막다른골목끝에부엌하나와방두칸짜리초가집이비였다.

(이도랑을100m쯤거슬러올라가면가운데끝부분에우리집이있었다)

고맙게도주인이이사를가며얼마간살고있으라고해서

좁은문간방에서우리4식구가분가하여이사를하고살아오던여름

여동생(미자)이태어났다,

생긋생긋웃으며옹아리하며발장구를칠때면정말너무예뻤다.

새로이사간우리집은마당도있었고마당엔배추와무우도심었고울타리한편엔

토끼장도만들어암수두마리를길렀으며,누렁이도한마리키웠다.

토끼나개나모두우리식구들몸보신용이었고무럭무럭잘자랐다.

가끔잘키운개를팔면먹을것도장만하고살림에보탬이되기도했다.

그렇게기름진음식은먹지를못하고쇠여물같은풀뿌리만먹어놨으니응가를할땐

피똥을싸는것은다반사였고그렇게생활하던어느날필규가항문이빨갛게

빠져(탈홍)나와응가를하거나짚으로닦을때피를흘리며괴로워했다.

빠져나온항문이좀처럼낮지를않았었는데,

소나기가쏟아지던어느날아버지가개구리수십마리를잡아뒷다리를한꾸러미

갖어와숯불에소금을뿌리며구워동생에게몇일을먹이고난후탈홍이감쪽같이

속으로쏙들어가사라진후다시는탈홍을보지못했다.

(지금도나는병약한어린이들을볼때개구리뒷다리를몇일구워먹여보라고권하고

싶지만참는다.자칫환경론자들의마음을아프게할까봐….)

아버지와엄마가일을나가면나는필규와미자를보며집을지키는것이일이었다.

당시5살이던나는동생의기저귀도갈았고동생을업어주기도했지만

소쿠리를이용한덫으로참새도잡았으며

샘에가서물을길어다솥에붙고아궁이에불도지피는일도했었다.

또앞동산에올라가나무를해서땔감으로모아오기도했었다.

날이어두워지면아궁이의숯불을꺼내다등잔심지에호호불어등잔불을켜놓고

방을밝힐줄도알았으며

(석유등잔불)

늦게오시는아버지와엄마를마중나가며미자는업고필규의손을잡고100m아래

종각까지나가아버지와엄마를기다리기도했다.

언제던가누렁이가잠시밖으로나온새끼밴에미토끼를물어죽여버렸다.

그날밤부엌에서아버지엄마가소근거리는소리가나서부엌으로가보았더니낯에죽은

토끼를털을벗기고배를갈라속에서나온빨간새끼를아버지가엄마보는데서꼴깍꼴깍

목으로넘기고있었다.호기심반,징그러움반생각에물어보았더니약이란다.

"아버지그거징그럽게왜먹어?"

"응약이야,아깝기도하고너도하나먹을래?"

허~걱~~

나에게먹일것같아무서워아무소리안하고얼른방으로들어와버렸다.

다음날우리집에선고기냄새를피웠고토끼탕을할아버지와할머니도갖다드리고

아버지와엄마도맛있게먹는것같았다.

그런얼마후나쁜누렁이가없어졌느데,아버지엄마가누렁이를찾지않는것을보면

아마도팔려간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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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별세

피난온지2년남짖,1952년8월.

허약해지신할아버지께서자리에누워일어나지를못하셨다.

가까운이웃이6.25국방군의이념이달라북진때달아나행방불명이된이후에

자괴감에빠져시간을허송하며두문불출하고인생을포기한것이아닌가생각었다.

영양부족에이질(?)까지있다고하여

평소에좋아하시는단고기를한마리할머니가해드렸더니

잘잡수시고기운을차리는가싶었는데연거푸설사만계속하시다가

다음날그문간방에서운명하셨다.

지금도작은며느리인어머니가말씀하시길할아버지가돈때문인지고의로병원을

안가셨다고하며병원만가셨으면안돌아가셨을것이라고했다.

할아버지가운명하시던아침10시동녘의방문으로들어온햇살이서녁의창문으로

반사되어나가는뿌연안개(瑞氣)가1분정도보였다고했다.

(왼쪽이외양간이고독뒤의흰부분이대문,가운데가문간방방문,당시엔창호문이었다)

할아버지가그렇게돌아가신후

나에겐큰아버지의큰아들인완규형(종손)이있었다.

그형은나보다나이도엄청(10여세)많았고공부도잘했는데뒷바라지를안해줘서

객지를떠돌며중등학교공부를한다고했는데그형의얼굴이본기억이나지않는다.

우리집안에선둘째의장남인내가제일나이(6살)가많아장손대신귀여움을받았다.

그것은아버지가부지런하고착실하여할머니를부양하였고

큰아버지는매일을공자왈맹자왈하며사서삼경이어저구저쩌구하며술타령만하시니

그분의자식들보다더더욱나를귀엽게봐주시는것같았다.

아무튼혼자되신할머니는우리집과가까이계셨고우리삼남매를특히귀여워하셨다.

피난살이의많은애환을안고살았던가운데할머님댁의문간방은

지금도나의추억속에고스라니남아

한해두어번선친의묘소를찾아갈때옛생각잠기며들려서가운데할머님의둘째따님인

인순이아줌마와아저씨와반갑게인사하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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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7월27일10시휴전

1953년7월27일10시참담하고지겨웠던전쟁이휴전으로끝났다.

큰고모댁은바로사촌형학교때문에우리보다일찍상경하여인천으로올라갔고,

한살아래인나는다음해인1954년봄회인국민학교에입학하였다.

그학교엔커다란연못이있었는데어느날전교생이모여선배형들이연못에서맨손으로

어른손바닥보다도큰물고기를잡아내는재미있는행사를본것이마지막기억일뿐

회인국민학교에서의추억은없었다.

다만학교앞장터에서엄마가사주었던으름,

으름의크림처럼부드러웠던고소한단맛을잊을수가없다.

아버지와엄마는이렇게4년여를피난지회인에서고생고생하면서도

거금천삼백만환을(화폐개혁후13만환;흰쌀한되100~150환)모아

1954년봄인천만석동으로귀경을할수있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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