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자주다녔던아버지는몇달째노동일로꽤많은돈을벌어모았으며
읍내국민학교에다니는나는고무신도얻어신기도했고새작기장(공책)과
노란연필도몇자루인천에서내려올적마다아버지가선물로사오곤했다.
아직은책은없지만책보에는작기장과깡통을잘라만든책밭침과양철필통이
들어있어서걷거나뛸때는딸그락,딸그락소리가허리춤에서장단을마춘다.
그소리가그렇게듣기좋아서학교를가거나올때는꼭이리뛰고저리뛰고뛰어
다녔다.
1954년봄,
나는난생처음기차를타보았는데,속이우리집보다도몇배나엄청넓고크다.
이상한것이그렇게크고넓은기차가좁은철로위를넘어지지않고흔들거리면서칙칙폭폭
하얀연기를뿜으며달리는데기차안에서는덜커덩,덜커덩소리만났다.
그리고기차안에서보면기차는가만히있는데산과들그리고논들이달려가고있었다.
처음타보는기차,밖을보고안을보고,또달려가는밖의들판을보고또기차안의바닥을
보아도참이상했다,
그런데도기차는칙칙폭폭,칙칙폭폭긴철로길을잘도달려갔다.
회인에서도라꾸(트럭)를타고대전,대전에서서울행기차를타고영등포영등포에서다시
인천행기차를갈아타고복잡하고시끄러웠던동인천역에4년만에8살이되어서
돌아온것이다.
(석탄을때서움직였던증기기관차;자료사진)
동인천역앞은무척복잡하고어지러웠다,
자동차부속가게.베아링가게,빵꾸집,볼트가게,모비류(오일)가게,연장가게,대장간,
뺑기(페인트)가게.구호물자옷가게,국밥집,대폿집,염색집,약국등무수히많았으며
시끄럽고사람이들끓어그야말로난장판이었다.
우리식구는인천만석동9번지피난민촌의울타리도있고마당이있는학고방으로
이사를했는데판자울타리안에줄넘기할정도의마당도있고방하나,부엌하나
장독대까지있는그피난민촌에선작지않은독채였다.
하지만장마땐여기저기서비가새어천막으로덛덮어서고치며살았고
마당엔군용야전침대를하나놓고잘곳이없어매일여인숙에돈을내고자는아버지와
같이일하는노무자에게월세를받고몇달을살게도했다.
그렇게찢어지게가난했었고돈되는일이라면안방웃목이라도세를줘야했었다.
피난민모두가이렇게굶주리며헐벗고어려운삶을살고있는이유는바로북한괴뢰
두목김일성이가자행한6.25불법남침때문임을
우리모두는절대로잊어서는않될것이다.
1954년음력윤달3월17일4째동생봉규가태어났다.
내생일도음력3월17일이지만봉규는윤달에태어났기매년생일을찾아먹지못하고
가끔나와같이생일을보냈다.
봉규가돐이지나고필규와미자가아이를볼수있게되자어머니도아버지가일하는
곳에서허드렛일을하거나국수장사를했다.
아버지는만석동부두로나가본선의하역작업노동판막일을하였는데새벽밥을먹고
4시통금이해제되면부두로나가줄을서서기다리다십장이나반장들이지명하면
작업을배정받아하루일을했다.
그렇게해서1년을쉬지않고열심히일한덕에같은동네에새로막지은마당포함
10평남짇한다락방이있는판자집5세대양철지붕연립주택으로이주를하였다.
이때의집값이구화로천삼백만환이었다고어머니가2010년4월에말하셨다.
여기서도아버지와엄마는부엌을통하여안방을들어가서사다리로올라가는다락방을
불편함을마다하지않고월세를놓아살림에보태었다,
나는동인천역에있는축현국민학교1학년에입학하였고약2km정도되는거리를시간이
지나친구가생길때까지혼자매일걸어다녔다.
학교에갔다온나는아랫동네공동수돗가에가서10환을주고지게로물을
길어다물탱크에채워넣기도했다.
물값이아까워서물을가득받으면너무무겁고(약45kg)힘들어올라가면서다쏟게
되므로아깝지만물을85%(40kg)정도만받아지고올라다녔다.
하루는욕심에어른들이말리는것도마다하고어른들처럼물통에찰랑찰랑하게
물을받아간신히지고뛰뚱뛰뚱걷다가그만앞으로거꾸러지고말았다.
내몸아픈것은생각않고물통이온전한가먼저살펴봤더니물한통이엎어지고나머지
한통은70%쯤남아있었다.
그걸본순간쏟아져흘러가는물이아까워서눈에서눈물이핑돌았다.
물파는아저씨가보더니
"다치지않았냐?
그것봐라어른들도힘든것을네가너무욕심을냈지,이리와라한통더줄께"
물한통을그냥주는아저씨가고마워서몇번이고허리굽혀인사했다.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
하면서신나게물을지고집으로돌아와탱크에쏟아붓고아까부터아픈손바닥을
보았더니양손바닥이모두땅에쓸려서피가나고있고무릅도까져서빨갛게피가나고
흙이묻어있었다,조금아픈듯했다,엄살을필정도는아니었고눈물이고이고울고
싶었지만입술을꼭다물고엄마에게말하지않고참았다.
(물한지게의무게는45kg정도내나이9살이었다)
그러다나중에는한2년정도땜통으로바뀌었다가별명이사라졌다.
땜통은머리에생기는병인데이발소에서소독안된바리깡으로빡빡깍을때기계충이
머리에옮아버짐처럼둥그렇게퍼지며가려웁고심하면피도나는피부병이었다.
그때짬빵을땜통으로동네아이들이바꿔불렀다.
땜통이라는별명은정말싫었지만머리에난피부병이땜통이었으니기분나쁘지만
참고지내야했다,
지금도생각나는내별명,
"문규새끼는짬빵이래요,
땜~통,땜~통,짬빵이래요땜~통,땜~~통,짬빵이래요"
나는그림을좋아했고내가생각해도어른들보다도참잘그렸다,
국민학교6년간반장은못했어도학급분단장은세번정도했고학년미술부장은
상급3년간계속해서맡았다.
그실력으로돌붓(석필)을갖고동네골목에그림을그리기시작하면어른들이그림을
구경하며밟을까봐조심조심피해다니는모습이참재미있었다.
그동네사는아이들중생각나는친구가있는데동갑내기봉환이.마식이가있었고
그친구들은우리또래중에서가장얌전하고부모교육을잘받아서인지선하고
악의가없어나하고무척친하게지냈다.
피난민들특히1.4후퇴때북에서남쪽으로피난해온수많은사람들이인천만석동의
피난민판자촌에정착하였다.
인천엔수많은수입수출화물선들의왕래로부두하역일이많았고이런하역작업은
상당히오랜기간동안계속되었다.
동일방직과대성목재그뒤의바닷가엔수입통나무가축구장만큼씩넓게떠있는것이
여러군데있었다.
이통나무들은바다에떠있는큰본선(화물선)에서바다로떨어트려굵은쇠줄로수백개씩
묶어대성목재까지끌배(예인선)로끌어와바닷가위에띄워놓았다.
힘이있는남자들은부두에서석탄,설탕,고철,호밀,옥수수,소맥분,모래등의하역
작업을하며돈을벌었으며,
여성과아이들과노인들은연장을만들어바닷가에떠있는통나무의껍데기를벗겨
한짐씩또는한구르마씩갖어가화목으로팔거나말렸다가겨울에땔감으로이용했다.
나는,
아니,
우리들은이곳에서생존의기술을발휘하며잡초처럼끈질기게살아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