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피난살이 5 편

인천남중학교학생이되었다.

"문규학교등록했어요?,이거문규입학금에보태써요,

어서가서등록해요,나시간없어서바로갈거야."

하며들고있던누런포장을방바닥에던져놓는데턱~하는소리가나는것이

돈뭉치였다.

고모부가외조카에게큰은혜를내렸고

어린나는소리없이눈물을흘리며고모부에게

백번,천번머리를조아리며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를연발했다.

그리고고모부는진흙탕을튀기면서급히돌아나가시며빗속으로사라졌고쫓아나갔던

아버지가고모부를잡지못하고비만맞고돌아오셨다.

시퍼런100환짜리돈뭉치3개가묶여있는뭉치돈이였다.

세상에..생각도못했던고모부가우리사정을알고등록금을마련해오셨다.

아마고모부는어려운환경에서찌질이도고생하던처남댁조카가중학교에가는

기념으로그냥학비에보테라고축하금조로마련해오신것같았다.

힘이나신아버지는바로우비를입고학교등록금을내러상업은행을다녀온다며

나가시는데조금전에보였던그런어두운얼굴이아니고기쁨이가득한신나는

모습이셨다.어찌아니좋을까^^*

학교를등록하고나니동네사람들은공립학교인남중에합격했다고나를공부를

잘하는모범생으로알고국민학교5,6학년아이를갖은부모들이자녀들과외를

부탁하는사람도있었다.

그러나우리의살림살이는좀처럼나아지지않고먹는것은주식이말분가루수제비

였으며가끔쌀을조금섞은아욱이나근대죽이전부였다.

나와동생들은먹지못해얼굴엔하얗게버짐이피었고동사무소나교회에서우유죽을

배급할때면여동생인미자가냄비를들고가반정도의죽을타오는데옥수수가루를

끓인후에우유가루를탄죽을타다동생들과나누어먹으며연명하였다.

(우유죽배급을타려고기다리는어린이들;자료사진)

1960.4.19

너무멀어다니기싫은학교를억지로등교하는길에화평동삼거리에서만난고등학생

형들이데모를한다며학교갈필요없다고하는말을들었을때내심좋아하면서도

혹시라도거짖일가봐좀더걸어가며주위를살펴보니중학생들은모두되돌아집으로

오고있었다.

나는언제부터인가매일걸어서가야하는학교가가기싫어졌다.

가끔숙제도안해서학교에가면벌을서기가다반사였고키가작아서앞자리에앉아

매일선생님에게본보기로혼났으며,

뒤에앉은키가큰애들은심심하면이유없이앞뒤로오가며나를한대씩쥐어박았다.

그러니오늘처럼이런사건이터지면핑게김에학교를안가도되므로기분이좋았다.

……………………………………………….

1961년5월16일

부패한민주당정권은민주라는미명하에저마다잘났다고목소리만높였고

국민들은추위와굶주림에삶의희망을잊어버리고어렵게살아가고있었는데도

위정자들은민주주의만부르짖고있었으니,

이를보다못한박정희장군이군사혁명을일으켰다.

이런가난과어지러운정세를고치겠다고우리도한번잘살아보자고…

이때이런결행이없었다면어느누구도우리나라를오늘처럼살기좋은나라로만들지

못했을것이고,조국근대화는꿈도못꾸고아시아2위의경제부국이었던필리핀.

"양키고홈"을외쳤던필리핀신세보다더못했으리라.

몇일안되었는데평소에깡패짖하며불쌍한사람들을공포에떨게하던양아치들이

잡혀갔고,

책상에앉아으시대며군림하고돈을받아챙기던악랄했던공무원들이잡혀갔으며

죄지은순경도잡혀갔고.또새로이사온어떤친절했던사람들은간첩이라며잡혀

갔다고했다.

그리고곳곳에서새마을노래가울려퍼지고여기저기새로운공사가시작되었고

동회에서는과거보다훨씬많은배급물품이나왔다.

누가사람죽이는군사독재라고하는가?

나는등따듯하고배부르고학교갈수있고신나게뛰어놀수있는좋은세상인데…

1962년중학교3학년때

6월에1,000환이100원으로1/10로화폐가바뀌고이때큰손들의지하에감취진돈들이

들어나밝혀지고금융권으로모아지며시장에돈이돌기시작했다.

감춰진수많은돈들을갖은사람들은일정금액밖에교환이안되었기은행에입금하지

않을수없었다.감췄던돈을빼았은게아니고그냥은행으로끌어드린것이었다.

돈을숨기고있던고리대금업자나,부자들은울며겨자먹기로교환하지못한돈모두를

은행에넣어야했다.

이때의화폐개혁이미국에게는환율조정때문에환영을받지는못했지만우리나라의

어두웠던지하에숨어있던경제를밖으로끌어내어돈을돌게하는데는성공을한것이다.

(100환이10원으로바뀐당시의지폐)

아버지는고모부의소개로인천시민극장(인천극장–>현재프린스극장)에청소부로

취직하여평생직장을갖게되었고당시월급은2,000원이었다.

시민극장K사장님은종전되어건설용으로야적한씨멘트가전부물에젖어사용불가

할정도로굳어있는것을복구사업에썩은씨멘트라도웬만큼은사용이가능할것이라는

확신을갖고헐값으로은행에서불하받았는데

될사람은엎어져도재수가좋다고수천포나되는씨멘트가겉에만굳었고속은멀쩡한

새씨멘트그대로였기당시전후복구사업에씨멘트하나로엄청돈을벌었다고했다.

12시통금시간이다되어11시반이후에나퇴근해오시는데아버지는가끔10원짜리지폐와

재수가좋은날은어떨땐50원짜리파란돈도한장씩청소하며주어오셨다.

그렇게몇달이지난후저녁막상영이들어가고약10여분이지난후부터는아버지가

기도를보시기도했는데이때부터는관람료의반정도만내고입장하는사람이있어서

월급외에부수입을갖을수가있었다,

물론아버지는직원들과의화합을위하여가끔분배도해주셨다.

(좌;아버지의청소부시절막내동생과,우;상,하;기도로승격하고직원들과)

59년에진규(5째)와61년에막내성규(6째)가태어나고우리식구는9식구가되었다.

극장청소부가편안하긴했지만막노동판의임금보다훨씬적은월급으로하루두끼니먹고

살기가힘들었다.

일요일이나공휴일엔배고픔을조금참았다가10시가넘어서아욱보리죽을한사발먹고,

점심겸저녁을오후6시에먹으면하루에두끼를먹는데이것마저너무벅차서

양계장이나가축등의사료로쓰이는말분(공작표밀가루를뽑고남은찌꺼기)가루를

가마니로사서아침이던저녁이던한끼는그것으로수제비나개떡을해먹을수밖에없었다.

학교에가는어느날은도시락으로개떡을싸갔는데아이들이하얀쌀밥과바꿔먹자고하며

자기도시락을놓고뺏어가는데맛도없는개떡을주고쌀밥을먹자니너무미안해안절부절

하면서얼른쌀밥한숫갈을먹어보니반찬이없이도입안에서사르르녹는것이씹을수록

달았다.

그도시락을먹으면서집에있는동생들생각이나서눈물이나고울컥목이메어왔다.

하얀이밥도시락….반만먹고반을남겨서집에갖고가고싶었었다.

모든식구가쌀밥한번이라도배불리먹고사는것이소원이었던시절

나는극장앞마당에서노점(오징어,땅콩,껌,과자등극장간식)을하자고

제안을했고그다음날가로150cm세로90cm좌판을만들어사과괘짝두개위에올려놓고

물건(비스켓,산도,땅콩,오징어,껌,캬라멜,건빵등)을진열하고장사를시작했고

이좌판장사가우리의생활에점점활력을불어넣기시작했다.

아침에엄마와아버지가같이출근하여한번도사용않는극장왼쪽매표소안에보관했던

좌판을꺼내벌려놓고엄마가10시부터장사를시작하고

오후엔필규가먼저도착하여엄마와교대하고3~4시에도착한나도저녁장사를거들었다.

밤10시까지첯날하루매상이기대치보다훨씬높았다.

5원10원씩받는장사였지만300~400원을팔았고이익이100원정도생겼다^^*

아버지월급이한달에2,000원에비하여좌판장사로하루에100원의이익을보았다.

첯날장사로서꽤괜찮은수입이었다.

(학교에서오면왼쪽뒤의좌판뒤에앉아막내동생을보며장사를했다)

또한냉차장사를추가하여물항아리를구르마에올려놓고지붕도세워놓았고

뺑둘러氷자와보리냉차라고빨강페인트로내가직접써놓았다.

아이스케키집에서사온얼음을물을넣고휘휘저어갈아놓은볶은보리한컵을

항아리에쏟은후카라멜원료로색깔을내고신화당을한봉타면보리냉차가된다.

이렇게만든보리냉차를한컵에10원씩팔았고

보리냉차가모두맛이있다고하는데내가먹어봐도정말달고고소하고맛이있었다.

겨울엔냉차대신연탄불을피워놓고오징어와밤을구워팔았고영화상영이끝나고

쉬는시간에관람객들이극장안에서창문으로보리냉차.오징어,군밤등을사먹는다.

우리형제중나는중학교3학년,필규는중학교1학년,미자는만석국민학교5학년,

봉규는만석국민학교2학년이었고학교에가야할동생이아직도3명이더있다.

정말줄줄이사탕이다.

어쨌던우리아홉식구는하루에두끼의하얀쌀밥을먹을수있게되었다.

이것은우리식구뿐만이아니고그동안열심히살아온모든피난민들도그랬다.

실제로옛날이씨조선시대부터우리같은서민무지랭이가하얀이밥을하루에두끼를

먹을수있다는것은꿈에나가능했었던일이아니었는가?

나는우리의생활이이렇게나아지고있다는것을몸으로느끼며이모든것들이

박정희대통령의군사혁명이없었다면불가능한일이었다고동생들과자식들에게

가르치고있다.

그런데참이상하다.

지금의세태를보면그렇게생각않는사람들도있는것같다.

우리나라일부정치인과그시대를살아보지도않은젊은이들은빨갛게좌경화되어

우리나라독재자의원조는태조임금이성계와북한의김일성가문인데도불구하고

우리나라국민들을배부르게해준박정희대통령만유독독재자라고까대기하고

있는데,

역사를제대로배운사람이라면안그럴것이라생각된다…….

나의중학생활은피난살이못지않게힘들고굴욕적이었다.

워낙약골에키가작았고,운동은소질이없어서운동장에서뛰어놀며즐기는구기종목은

언제나열외였으며하물며인원이부족해서잠시라도대타로나가뛰려고하면급우들의

비난과질타와멸시를모두받아내야했다.

거기다가끔귀에서고름도흘러나오니같은반급우들에게는비호감이가득했고

따라서학교급우들의무시와잦은폭력으로학교생활이진절머리가났다.

학교가서급우들에게수봉공원으로끌려가서매맞는것보다차라리만화가게에서만화나

보며결석하는것이더좋았다.

그렇게세월이흘러학교공부는완전히망가지고그래서학교는더욱멀어지게되었다.

절반의결석으로담임선생님의가정방문과통신문에의하여퇴학대상임을

아버지가알게되었고그날부터2박3일을아버지에게또한번엄청나게맞았다.

그후3학년2학기체육시간이었는데조금늦게나간것이빌미가되어체육선생님이

오른쪽고름이나오는귀를잡아비틀며묻는데그의도가무었이었는지아직도모르는말,

"박문규저기수봉산에뭐가보이지"

"수봉산꼭대기에아무것도안보입니다"

하고말했더니귀를잡은오른손에더욱힘을주며흔든다.

귀속에차있던고름이뻥뚤리고흘러내리는가했는데갑자기소리가왕왕크고시원하게

들리다가다시원상태로작아져들린다.

통증에얼굴을찡그린얼굴로

"선생님저귀가많이아파요"

하며잡혀있는오른쪽귀를놓아달라고호소했다.

그때선생님이비틀고있던내귀를놓으며흘러내리는누런고름을보며난감해하던모습이

무척안되어보였었는데…..

이일이있은후나의오기와자학증세(?)를틈만나면

체육선생님과급우들에게보여주기시작했다.

한번도못했던턱걸이와야구선수배팅연습용자동차타이어를멀리서달려와

머리로받기,그리고모두가기피하는회전사다리를타고여러바퀴돌기등..

그렇게열심히운동을하며약3개월쯤되었을까?

턱걸이는선생님이한참을센후에그만해할때까지했고

회전사다리는내가어지럽다고느낄때까지거꾸로타고빙빙돌고네려왔다,

구경하던얼간이들은내가한바퀴씩돌때마다하나,둘,셋,…하며올려보며세고있었다.

나의이미친행동이나를괴롭히며힘들게했던자기들을향한증오의표현이었으며도전의

서막이었음을모르고하나,둘,셋,….하며세고있는얼간이양아치들…..

(고교시절은철봉에매달리면돌고날았다,야간학교라복장들불량)

참으로유쾌했다,잡시라도못난놈들의선망의대상이되었기…

그리고는10m쯤옆에있는배팅연습용타이어로달려날아가햇딩을하고는어지러워

운동장이뱅뱅돌았지만뒤돌아서그자리에우뚝서서선생님과급우들에게보란듯이

나도오기가있음을보여주었고,

그후부터는깡패들에게매를맞는일이있드래도물러서지않고그자리에서꼿꼿이서서

매를맞으며버티고있을수있었다.

나중엔어찌되었던지중학교만은마치라는아버지의말에따르며잔여학기를모두

출석하고학업성적은창피할정도였으나인천남중학교13회졸업장을받기는했다.

그러나중학교3년동안소풍도한번같이못가보고졸업앨범에도내얼굴이있을지

모르지만나는중학교에서찍어본기념사진이한장도없었기졸업생누구나한권씩

사가는졸업앨범도살수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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