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피난살이 6 편

港都商業高等技術學校(야간)를가다

중학교를졸업하기전부터졸업을한한달정도기간에내키가부쩍(15cm이상)컸다.

작아서앞자리만앉았던중학교시절에비하여저절로몸에서기운이솟았고모든일에

자신이붙기시작하는것을느꼈다.

내나이16살,

놀면뭐하는가?뭐라도해야한다하는생각에아버지를통하여

잠시나마극장간판을그려보기로하고간판부장과협의하고모두가퇴근한후에

간판부에서혼자밤을세우며배우들김진규,최무룡,황해,이예춘,허장강,구봉서,서영춘,

박노식,배삼용,신성일,김지미,문정숙,엄앵란씨등의얼굴을페인트로연습삼아그려보았다

그런데로배우들의특징을잘그려내한번은내가그린간판을내걸기도했었다.

그런데극장간판기사의수입이생각만큼만족한월급이아니었고장래가밝지를않았기

간판기사로내인생의꿈을키우기는무언가많은부족한감이들었기만족할수가없었다.

그러나나의마음은언제나내가우리집의장남이며큰형이며오빠며맞이인만큼

모든면에서본보기로모범을보이고집안을이끌어가야한다는책임의식이자라기시작

했던시기였다.

그까짖극장간판기사로내인생을허비하는것은인생실패라고느꼈다.

아버지가고등학교졸업은해야하지않겠냐며야간고등학교라도가서고교졸업장하나

받자고하시는아버지의말씀에몇일을고민을했다.

하기싫은공부,

이미중학교과정을엉터리로했기에고교를다녀봤자별이득이없을것같았고또다시

학교깡패들에게능멸당하고매를맞으며싸워야한다는생각에선뜻내키지않았다.

또다시3년간을학교에다니며폭행에시달림을당해야한다는것이제일싫은일이었다.

그러나한편으로는만화가미술가의꿈도있었기알파베트몇단어는외워야하겠고

그리고맏형으로서의책임은지켜줘야한다는생각으로아버지와엄마에게고등학교에

가겠다고하고

인천시신흥동에있는항도상업고등기술학교를찾아갔다.

그리고300(?)원의전형료를내고등록을하고고등학생이되었다.

야간고등학교.

청운의꿈을키우는만학의배움의터였다.키는비슷했지만인상이험하게생긴덩치들이

생각보다많았고나이가나보다두세살많은아이들도많았다.

모두직장에다니거나가사를돌보는친구들이고그야말로열심히공부하여상급학교에

편입학하기위하여입학하기쉬운야간학교를택한친구들도있었다.

모든것이새로웠고특히한반에남녀학생이같이공부하는것도꽤즐거운일이었다.

이제는키도평균보다커서내가일부러앞에앉지않으면뒤로밀려앉아앞쪽의칠판이

잘보이지않을정도였다.

또한한반에이름이비슷한한살연상인그림을잘그리는문수친구와친하게지내며

우리집에자주놀러왔다가우연찮게전기가없는우리집에전기를놓게알선해주어

몇일후부터우리집도전깃불을켜놓고공부를할수있었다,

우리식구는모두가내친구문수에게몇년을감사하게생각하며살았다.

나에게운동(유도)을배우라며격려하며힘을실어준키가작고야무졌던황XX친구가

유도장다니기를제의해왔는데,

마침나는얼마전극장노점에서하루종일장사한돈통을극장앞양아치들이훔쳐가는것을

보고도힘이없어빼앗긴적이있었고중학교3년간매맞으며괴로웠던생각을하며격투기

수련의절대필요성을느끼고있었던터였기유도를배우기시작했다.

1학년여름창영동에있는상덕관을한달여간다니며낙법을열심히배우고대련도몇번

했지만결국은두달만에골병이들어못견디고중도하차하고말았고

얼마뒤학급에서제일친했던원우와같이인천홍례문아래있던제2시민회관상무관에서

다시시작하고서슬슬유도에재미를느꼈고단독호신정도의능력을갖게되었었다.

이제는두려울것도없었다,

누가시비를걸어오면점잖게피하거나당당하게어깨를펴고상대의눈을노려보며배로밀어

부치며으름장을놓을뱃장이생겼다.

그러면서학교생활은더욱즐거웠고학교의모든일에솔선하며열심히다녔기2학년2학기부터

3학년1학기까지1년간학교운영부장을맡기도했다.ㅋㅋ운영부소속에는규율부가있다.

상업학교인만치부기부와주산부가있었고주산반반장도맡기도했다.

3학년1학기어느날,

남중학교에서깡패들과함께나를괴롭혔던서XY가전학을왔다.

그친구는아직도내가중학교시절의겁쟁이인줄알고있었던것같았다.

학교일에매우능동적이며앞에나서서일하는나의모습을보고건방지고아니꼽다고

생각하였는지싸움을걸어왔고

학교위해광사마당에서쉬는시간(10분)에맞장(결투)을뜨자,

하고제의해와나는망설이지않고기꺼이동의했다.

그는내가이렇게쉽게결투에동의할줄을몰랐었고이미꺼낸말을여학생들까지있는

자리에서체면상취소도못하고난감해하는기색이보였다,그는이제는나보다

주먹하나정도는키가작았으며학교에서의지위도내가그를압도하고있었다.

나,

박문규는,

지나온중학교3년을다니며얼마나대책없이폭행을당하며울었던가,

한편으론또얻어맞지않을까?하며

불안한마음도있지만이번에이결투를피한다면그는계속나를계속깔볼것이었다.

이제그첯번째복수의기회를그가주었는데피할이유가없었다.

가볍게이겨준다는일념으로약속시간에마추어

만약의불미한(?)사고에대비하여급우들몇명을동반하고캄캄한해광사로올라갔다.

가볍게이겨주리라…….하며….

3교시가끝난8시50분,지금부터휴식시간은10분이다,

이기던항복을하고굴욕을당하던10분안에결투를끝내야한다는비장한각오로

한걸음한걸음해광사로올라갔다.

동행하기로한7~8명보다조금먼저해광사마당으로올라가한가운데자리잡고서자

곧이어서XY가어둠속에서나타나고저고리윗단추하나를클르며격투기자세를취하며

말을걸어왔다,

"야박문규이ㅈ만한놈너많이컸던데~..,하는짖이엄청건방저

눈꼴사나워못보겠던데~오늘정신좀차리게해주겠어"

이말은강자의입장에서우월감에젖어할수있는그의마지막말이되고말았다.

"야~XY~임마우리사이에긴말은필요없잔아?"

하며복싱자세를취하고있는그에게다가가그친구의뒷목옷깃을잡고으라챠~!!!하는

기압과함께끌어당기며허리튀기로허공으로튀겨날렸다.

긴~말과긴~시간이필요치않았다,

딱한마디와눈깜짝할시간이면충분했다.

그가땅에떨어지기전에머리부터떨어지면잘못될수도있으므로그의왼손을잡아

거꾸로떨어지는것을막아줬다,

그가땅에나가떨어지며땅이쿵하고울리며

헠~하는비명을지르고숨을못쉬고괴로워하며안방인양뒹굴었고,

옆에서참관했던친구들이벌어진입을다물지못하고있었다,한마디로놀랐다,

그가내위에서뒤집어지는것을보고놀라고나의순간적인행동에더놀랬다고했다.

나,

박문규는,

이순간이세상을모두내것으로만들수있을것같다는기분이들었다.

세상에태어나맞기만하고살아오다가오늘생전처음으로맞짱을뜨고또승리했다.

속으로북받혀올라오는기쁨의눈물을감추고떨리는심장소리를느끼며속으로표호했다.

"나도이세상을울지않고살아갈자격이있는사람이다~~"라고

이제이친구와의관계를확실하게정리할시간이다

나는두손을마주털며그를일어나허리를굽히게하고그의등을두드리며다짐을받았다.

"야~XY야사람이약하다고업신여기지마라,옛날생각나겠지만이젠아니야

그리고이학교는너같은양아치들이함부로까불어도되는곳이아니야,

앞으론이학교학생누구에게든함부로대하면안돼,지켜보겠어"

그렇게간단히말하고다시교실로돌아오니9시5분이약간넘어있었다.

그친구는교실에안들어왔고다음날도또그다음날도다시는내눈에보이지를않았다,

다른학교로전학을갔는지…

(참~놓고간책가방은갖어갔나모르겠네….아직안갖어갔나?)

(좌,상;1966년졸업식답사,하;후배들과기념촬영.우;1967년태양다방DJ근무시다방앞에서)

나의고등학교생활은晝耕夜讀(주경야독)에한가지더,아침에유도한시간수련하고

경북상회로출근하고5시에퇴근하여6시부터11시까지학교공부를했다.

경북상회는고2때학교에서알선해준개인회사이나인천에서규모가아주큰어업

회사였다.

하인천에서자선(自船)대구리(底引網漁船)배가11척이나되었고남쪽지방의어선들이

잡아오는어류의위탁판매와그들이다시출항할때가지모든편의시설을제공하고

일정의수수료를받는객주이기도했다.

나는이회사의둘째사장님이담당하는윤활유부서를맡아출항하는배들에게척당

20여일사용할정도인2~5드럼의선박용엔진오일을실어주고,회수된공드럼을

창고에쌓기도하고또이드럼들을필요한곳에공급도하고되팔기도했으며또배마다

수십드럼씩식수를공급하는일도맡아서했다.

어선들이잡아온고기들은수산청수산업협동조합공판장에밤12시부터새벽까지하역을

완료하고아침8시에경매를시작하고이경매는대략10시이전에끝이났으며경락된

수산물들은한두상인을더걸치고서울을위시한전국으로실려나간다.

이회사에서나는1,000원정도의월급을받았다.

이수산업이이루어지는부두에서벌고먹고살아가는사람들의직업을몇가지생각해

보면너무여러가지이다.

수산회사는고기도잡고팔기도하고,

선원들은고기를잡아온만큼비율로임금을받고

윤활유장사는배엔진오일을팔아살고,

연료회사는배연료인벙커C유를2~3백톤급유조선으로실어와배에직접주유하고,

수돗물을전마선으로실어다어선의물탱크에채워주는직업,

생선상자를목도로배에서어판장까지운반하는2인1조의노무자목도,

고기를경매하는전문직업인쎄리꼬,경매응찰하는상인경매조합원,

낙잘자에게서생선을사가는중간도매인,

여기까지는비교적회사의규모이거나자본이있는조직체가하는일이고,

하루벌어하루사는대부분의밑바닥서민들은

어선이출항후15~20여일만에입항하면다시출항할때까지盜防(도방)을해주는직업,

선박이물에떠있는동안선원들의취사를해주고생선이나돈으로몇푼받는직업,

전마선타고다니며배에올라와성에굶주린선원들의이야기(?)상대해주는직업,

어선에서생선을하역할때배밑으로흘린부산물을썰물후에주어갖어가는직업,

그리고모양과크기만번지르르한엉터리공산품,딸라손목시계,양말,가짜가죽구두,

가짜라이반,바다에나가면못쓰는광석라듸오,프레이보이포르노잡지,아이스케키,

찐빵장사,한번세탁에후들거리고줄어드는양복,공판장주변로상의좌판노점들….

그리고

어물전이모여있는끝에서나의엄마처럼냉콩국수를팔기도했다.

(살아숨쉬는삶의현장이었던하인천부두수산시장)

나에게고등학교3년간은청운의꿈을꾸는모든젊은청년들이그랬던것처럼내청년시절의

가장아름다운낭만과도전과희망을키웠던보람된시절이었다,

제일먼저나약했던중학교시절과달리자신감을갖게된것이고

그래서선생님이경북상회에취업도시켜주었을것이며그것이내인생의좋은경험을

키우게되었다

학교학생회에서는중요한감투도썼고직책을맡기도했다.

경기도내백일장에참가하여시제:"대화"로입선도하여문학청년으로의

꿈도키운적있으며

졸업날모범상과3년개근상을받았고,

정의롭고현명한원우,형렬,문수,광천,준모,영만,하영,형수,인영,영진,윤호,일관,득수,영수

영남,호성,승운이등친구들도생겼다.

내가운동하는모습을보고좋아하며사귀었던이KR라는목소리까지예쁜친구도있었다.

그러나대학(홍익대미술대)을갈조건이되었었는데포기한것은두고두고후회가됐다.

졸업후약40일정도를서울에있는국제영화배우학원(원장:배우김승호씨)을다녀보기도

했으나돈이들것같아그것도포기하였다.

학교를졸업하고다니던회사를계속다니면서

저인망어선인보금호에사무장으로승선하여흑산도에서경매한해물운반도해보았고

여름에선박엔진을보수하고시운전할때동행출항하여그물도내리고고기도잡아보았다.

(전마선노젖기,뒤에보이는선박들이90~100톤급저인망어선이다,좌측이보금호다)

나는내가갖은모든재주를아끼지않고회사의일을시키지안아도알아서해나갔다.

페인트도장이완료된배의이름을쓰는비용을아끼려고내가매달려직접썼고

출항때시꼬미(해상에나가서수십일간작업할식량,연료,어구및제반장비를준비해줌)를

도와주며사무장들과장부를정리하기도했고식수탱크를확인하고물장수를불러식수를

채우도록했고,

공드럼이널려있는창고에들어가사람을사서정리해야하는수백개의빈드럼을혼자서

3단쌓기도해놓고그러면사장님은다친다고인부를사서하라고하지만내가혼자다하고

용돈을받아쓰는재미도있었다.

또한시꼬미창고에들어가어른들이어지러놓은자재재료들을정리정돈을철저히하였다.

하루는큰사장님의군을제대한큰아들이이성에미처서행패를부린다고나에게큰사장님

집에가서자루에넣어오라고하여

어른들과같이가서내가그를엎어트리고자루에담아메고와창고에가두어놓기도했었다.

(개인회사라벼라별일을다시켰다)

군입대영장을받고회사를잠시쉴까하며

2째사장님에게좀쉬겠다고말하자3째사장님이경영하는태양다방에서DJ일이라도

도와주라고하여

운동을계속하면서인천경동의태양다방DJ로약6개월정도를지내기도하였다,

이때칸츄리뮤직과팝몇곡을즐겨들으면서꿈을만들어가고있었는데…….

나의학교와직장생활이계속되는동안상대적으로동생필규는나대신좌판장사를해야했고

여동생미자는

동생넷을단속하며집안살림을도맡아해나가야했던,일일히필설로다설명할수없는

처절한고생이있었기내가고교를졸업하고군대를다녀올수있었다.

꼬맹이였던13~14살미자가가난한집안의9식구살림을맡아왔던그녀가해왔던눈물겨운

일들은그녀의요구가있어서이이상의깊은이야기는여기에서밝히지않는다.

필규의이야기도역시

그나름대로의의견을존중하여더깊은이야기를나열하지않겠다.

그가집안을위하여살아온이야기는그의입장에서보면나의고생보다더심했기에과거의

잊혀저가는비극을되돌아보지않으려한다.

그리고1968년1월21일무장공비김신조가청와대를목표로인왕산을넘어처들어올때는

전쟁이나는줄알고겁도났지만운명이라생각하고이겨나가기로마음을굳히고

입대를강행했다.

출발하기전날헤어지는마지막밤을같이지세워준다방의알뜰한살림꾼이던

Y,S의배웅을받으며,고향인보은을경유하기위하여청주행직행버스를탔다.

그날은하늘도땅도날씨도모두흐린아주추운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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